2011년 1월 15일 토요일

회개기도

회개기도

본 문 : 시편 32:1-11
설교일 : 1998. 11. 8(주일낮)
설교자 : 성홍모 목사, 영주교회
 
우리는 한 해를 살아오면서 처음에 품었던 생각이나 결심보다는 주어지는 환경에 적응하며 살다보니 이런 저런 때가 묻었고, 죄와 허물만 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바르게 살아온 것보다는 너무나 잘못이 많고, 허물뿐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나 자신이 나를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뻔뻔한 존재이고, 심지가 아주 약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의 결심도 오늘 쉽게 무너지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나온 1년 동안 말씀대로 살았으며, 부름 받은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와 허물을 내어놓고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들어오면서 엎드려 기도하실 때 좀 더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지나온 잘못을 되돌아보시고 하나도 남김없이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어느 날, 왜 그렇게 무겁고 무거운지!, 몸도 나른하시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치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달고 있는 느낌을 받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여 생기는 영적인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하고,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깨끗하여야 합니다. 죄를 회개치 않고, 자꾸만 높이 쌓아두면 나중에는 양심이 화인 맞아 회개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때가 이를 수도 있습니다. 회개를 미루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탈무드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은 없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의 이웃들 앞에 내어놓으므로 혹시 부끄러움에 처하고 어떤 불이익을 당할는지 모르지만, 훨-훨 날듯이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여러분의 영혼이 호흡하면서 사실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종교와 우리 기독교를 비교하는 설교를 좀처럼 하지 않았는데,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은 불교에는 '회개'라는 용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가 인간들을 위해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곧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개인이 현세에서 범한 죄나 잘못에 대해서 어떠한 면제도 있을 수 없고, 개인 자신이 그 업(業)을 담당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회개에 대한 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공덕을 쌓아서 죄보다는 공이 많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적선한다는 말이 곧 공덕을 쌓아서 지은 죄보다 많아야 극락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선은 구천세계를 뛰어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회개를 통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공생애의 첫 번째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셨습니다. 회개와 천국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면 성도들이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보통 설교학자들이 분석하는 말인데 우리 교회 안에도 그 말이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잘 된다, 할 수 있어요, 복을 받으세요' 하는 말은 듣기 좋아도, '죄를 회개하세요, 깨끗하게 살아가세요' 하는 말은 듣기 거북하다고 합니다. 설교학자들이 하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도 통하는 말이라고 하면 오늘 참으로 듣기 거북한 설교를 들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회개와 지옥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빛을 잃었고, 스스로 소금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하고,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살길을 열어주시는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회개를 정말 수없이 강조하셨고, 명령하셨습니다. 행전 3:1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7:30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2:13)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성경의 수 없는 말씀이 죄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가는 대문"이라고 하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물론 죄를 짓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 사는 것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지만, 더욱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오늘도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회개라는 말을 해석하고, 회개에 대하여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이 회개를 통하여 어떠한 은총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본문 시편 32편의 말씀은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마스길이라는 말은 "생각한다, 깨닫는다, 교훈 반성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스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면 시편을 분류할 때 [지혜의 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서 서야 합니다. 불원간에 가야합니다. 이제 머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이 땅에 살 것 같지만, 툭툭 털고 가야 합니다.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서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이 땅에서 지은 죄 때문에 부끄럽고, 송구스럽고 그 모든 죄악을 물으신다고 하면 지옥에 들어갈 것이 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우니 죄를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말씀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하셨습니다. 임박한 진노에서 벗어나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길이요,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길이기에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이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주셨기에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에 용서해주시는데 그 아들 안에서 우리의 어떠한 허물과 죄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도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죄로 고민한 사람입니다. 구약신학자이신 김정준 박사님이 의역하신 것을 그대로 인용해봅니다. "나는 나만 알고 있는 죄를 고백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감추는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나는 온 종일 신음했고 이 괴로움은 결국 내 뼈에까지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 통증은 내 육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내 영혼과 육체를 누름으로 오는 고통으로 깨달았습니다. 이 통증이 마치 여름 가믐 때에 풀포기들이 그 수분이 말라 시들어 버리듯 나라는 인간은 그 존재의 밑바닥부터 시들어 가고 있는 고통을 느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봅니다.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믐에 풀 시들 듯,/ 진액이 다 말라 빠지고 말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인 다윗은 참회의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죄를 내놓고 회개하고 참회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결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고백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못된 점을 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수치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체면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고, 때로는 신용을 잃고 위선자로 낙인이 찍힐는지도 모릅니다. 다윗도 그래서 자기의 죄를 내놓기가 두려웠습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 자기의 죄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온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러한 괴로움은 결국 그의 뼈를 썩게 하는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 아픔은 마치 여름 가물 때에 풀포기들이 물이 없어 말라 시들어버리는 그러한 고통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의 그늘에서 이미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죄로 인하여 고민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고민을 눌러버리고 적은 죄에서 큰 죄로, 한 죄에서 다른 죄로, 오늘의 죄에서 내일의 죄악으로 점점 죄의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양심의 귀를 막고, 양심이 들려주는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아니 합니다. 점점 양심이 화인 맞아서 감각이 없습니다. 죄로 인한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용서받은 감격이 없다면 그는 신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의 일꾼이 되고 기관의 책임자로 일하는 것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바르게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나의 죄 문제를 놓고 함께 아파하시는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1-2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복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오 참으로 복되도다"라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시인은 두 번에 걸쳐 "복이 있도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 중에 사죄의 은총만큼 감사한 것은 없습니다.
자, 회개는 해야겠는데 사람 앞에 나가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런 아픔과 고통이 수반해야 합니다. 말만의 회개는 안됩니다. 회개라는 말에는 죄를 깨닫는다는 뜻도 있고, 돌이킨다는 뜻도 있고,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을 완전히 버리고 무조건 항복하여 새로운 주인, 새로운 주권을 인정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제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진노와 율법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회개했다고 하면 악을 버리고 악행을 중단해야 합니다.
저는 사1:16-17을 볼 때에 그 말씀이 회개의 전 과정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씻으라"고 했습니다. 깊은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깨끗케 하라" 예전의 악한 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내 목전에서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죄를 회개할 때 악을 버리고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선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사는 것은 새로운 삶을 배우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공간에는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머리라는 공간에 지식을 채우고, 가슴이라는 공간에 사랑으로 채우고 위라는 공간에 음식물이 채워지듯이 마음이라는 공간, 영혼이라는 공간에도 무엇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악도 없고 선도 없는 진공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이 그 사람에게 머물고 있다가 그만 쫓겨나서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였지만 쉴만한 자리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전에 살던 집이 그리웠습니다. 가만히 가서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어 새 집이 되었습니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았으면 성령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공간에는 누군가 주인으로 살아야 하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죄악을 버리고 청소하였으면 선행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선을 배우지 아니하고 악을 버릴 수 없습니다. 악을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선을 배워야만 합니다. 공의를 구해야 하고 섬기며 나누는 생활을 훈련해야 합니다. 단순히 악에서 떠나겠다고 하는 소극적인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엡4:28에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노후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육적인 향락을 위하여 저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질탕하게 놀아보기 위하여 저축하는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구제하기 위해 일해야 하고 돈을 저축해야 합니다. 그래야 도적질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회개를 권면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해야 하지만, 그런 것쯤은 듣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논리적으로 아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내가 엎드려야 하고, 내가 고백해야 하고, 내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회개에 올바른 과정이 무엇인지 몰라도 됩니다. 회개의 결과를 미리 확정해놓고 드리는 회개기도로 자기 위안으로 삼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야말로 하나님에게 한 번 지도고니 맞아야 할 사람이라고 때려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나쁜 죄인을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 뉘우치는 것으로는 가롯유다에 지나지 않습니다. 후회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뼈아프게 뉘우친다고 해도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베드로와 같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서도 예수님 앞으로 그리고 제자들의 공동체 안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말 안 하였으면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는지 안했는지 알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자기는 죽을 죄인이었고 배신자였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용서고 무엇이고 나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죄와 허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왜곡하고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간적인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말 공허하고 무익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갖은 노력을 다해 자신의 행동을 아름답게 미화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더러운 옷"(사 64:6)에 불과할 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또 목회자였던 에드워즈 목사님의 목회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목회하던 교구 내에 주정뱅이고, 도박꾼이고, 교회에는 나오지 않는 타락한 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이른 아침에 새파랗게 질려 에드워즈 목사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너,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 너를 불러가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 날부터 그는 술을 끊고 도박도 끊고, 교회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가더니 그의 발걸음은 교회에서 뜸해지고 점점 열심도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도 다시 조금씩 마시고 도박도 또다시 손대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는 그를 심방하고 그가 본 꿈의 환상을 회상시켜 주었으나 그 사람은 "글쎄요 글쎄요" 하면서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갔습니다. 드디어는 완전히 이전 상태로 돌아갔으며 이제는 목사님께는 반항적으로 나오면서 "무얼요, 개꿈을 가지고 그걸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습니까?" 하더랍니다. 어느날 밤 그는 어떤 술집에서 술에 만취가 되어 계단을 내려오다가 실족하여 떨어져 목이 꺾이어 급사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즈 목사가 일기책을 찾아보니 그날이 바로 1년 전 그가 자기를 찾아온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주의 주시는 환상에 순종하지 않는 자를 모두 이런 식으로 징벌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명백한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목사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할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 주시는 엄한 경고라고 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우리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의 음성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죄를 그대로 놓아둔 채로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고, 죄지은 채로는 교제하시지도 않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죄지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고 선 줄로 착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참아 보실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지한 자세로 나를 점검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이러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잘못을 고하면서 용서를 빌어보셨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에게 너무나 후한 점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철저한 자기 반성의 시간도 없고, 능력 있는 삶을 살려고 하는 몸부림치는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뿐입니다. 우리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구주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 임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 주께서는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어떤 책임도 묻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해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 기도와 함께 사죄의 은총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은신처가 되셨고, 환난에서 보호하셨으며,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시고 훈계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지한 말이나 노새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그 넓은 품안에 들어와 새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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