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선구자 진젠 도르프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선구자 진젠 도르프
 

1700년 5월 26일에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 가문 출신인 한 작센 선 제후국 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경건주의자 슈패너와
친밀하였으며, 프랑케와 함께 대중교육과 성경배포 그리고 선교를 장려하였던 외할머니 헨리테
카타리나폰 게르스도르프(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프랑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인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뿌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보낸 동 인도 선교에 관한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고
1713년에는 플뤼차우가 할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할레 재단의 선교적 지원을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젠도르프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 모임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그 후 1719년 진젠도르프는 네델란드와 프랑스로 연구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고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으로부터 그의
필생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주요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바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 교회의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Herrnhut)로 피난온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불리우던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기독교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공동체가 '모라비아파'라고 불리워졌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고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된다.
진젠도르프에 의한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지향적인 교회였다.
그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도하는 것이었다.
진젠도르프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특별히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전도를 실천하였는데 암스테르담, 발틱 국가들, 베를린, 제네바등지에서 집회를 갖고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이르러서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 모두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다음으로 중보기도를 들 수 있다.
1722년까지 90명이 헤른후트에 정착하고 1726년에 이르러서는 300명의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1727년
서로를 권고하고 부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작은 그룹들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4명의 형제와 24명의 자매가 자정부터 그 다음날까지 계속 기도하기 위해 각자 1시간씩 맡을 것을
서약하기에 이르렀다.
모라비안 교회의 시간 마다의 중보기도는 그 후 백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그 다음 2백년 이상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대륙으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모라비안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를 들 수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
(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
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 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고 하였으며,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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