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2일 수요일

일본인의 기원 - 3 (일본인의 종교)

일본인의 기원 - 3 (일본인의 종교)

C. 일본인의 종교
일본인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종교별 신도수의 비율은 불교가 48.2%, 신토[神道:자연숭배·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로, 神社를
중심으로 발달한 神社神道가 주류]가 51.2%를 차지하여 일본의 양대 종교가 되고 있고, 신·구교를 합친 그리스도교는
겨우 0.6%를 차지합니다.
일본의 종교는 일본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신토(神道) 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가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토는 일본인만의 독특한 토착 신앙으로 일본인들의 자연관이나 조상 숭배 사상의 주요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지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신이 낳고 주관하며 모든 자연물에 신이 내려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2대 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독특한 신불(神彿) 신앙을 탄생시켰습니다.
일본인 가정에는 신단과 불단이 함께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신단을 향해 절을 하고 또 조상을 모신 불단을 향해 절을 하는 일본인들이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요즈음은 '태어나면 진자(神社)의 우지가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에게 예를 올리고, 결혼식은 진자나 교회에서 화려하게
올리고, 죽어서는 오테라(절)의 호토케(부처님)' 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일본인들의 종교의식은 신앙 차원이라기보다는
생활 관습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면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설. 오미야마이리(남자아이는 31째, 여자아이는 32일째 되는 날에 신생아의 건강을 기원하는 첫 진자 참배를
말함). 시치고산, 진자의 축제 때는 부모는 자식을 데리고 진자에 참배하러 갑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아기 건강의 기원과 결혼식은 신토식으로 올리며,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스님이 참석하여 불경을
외는 가운데 화장을 합니다.
일본의 종교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고, 체계적인 교리가 없이 형식만 남아 종교라기 보다는 관습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인이 왜래 종교를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변질시키는 경향이 있고,
메이지 정부가 권력 강화를 위해 기존 종교를 억압하고 인위적으로 천왕 숭배를 강요해 신토를 보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일본인의 종교 역사와 무종교와 천황숭배의 실체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목차
1. 무종교의 실체
2. 무종교의 역사
3. 퇘색한 종교관
4. 천황숭배의 실체
5. 불교의 변질
6. 결론


1. 무종교의 실체
일본인은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일본인 중에서 확고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렇다고 무신론자라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대부분 자신이 '무종교'(無宗敎)라고 대답합니다.
여론조사 결과 일본인의 70%가 무종교(無宗敎)라고 대답합니다.
이상한 것은 이들 가운데 75%가 무종교이지만 종교심은 중요하다고 답한다는 점입니다.
일본인은 종교심이 대단히 강한 민족이지만 특정 종파에 소속되는 것은 싫어해 신을 인정하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무종교(無宗敎)라는 특이한 사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일본의 묘지 광고는 대부분 '종교를 묻지 않는다.'라고 선전하는데 이는 고객이 원하는 취향에 맞게 장례를 치루어
주거나, 나름대로의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해 주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거부하는 '교단 종교'란 종교를 만든 교조(敎祖)와 경전인 교전(敎典)과 체계적 조직인 교단(敎團)이 성립된
종교로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들을 말합니다.
일본인들이 믿는 '자연종교'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자연발생적인 종교로 선조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계승되었으며, 교조(敎祖)와 교전(敎典)과 교단(敎團)을 갖고 있지 않는 무속신앙 같은 종교입니다.
일본 사람은 정월 초하루에는 젊은 층까지 대부분 신토를 다녀 오는 '히쓰모데'라는 행사를 갖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이유에서입니다.
또한 매년 7월에는 고향에 내려가 절에 가서 조상에게 공양하는 '오본'이라는 불교식 행사를 치룹니다.
봄 가을에는 조상의 묘를 찾아 묘에 물을 끼 얹는 '피안'이라는 출처 불명의 행사를 갖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같은 행사를 무의식중에 반복하면서 어느 틈엔가 자연종교에 동화됩니다.
일본인들은 이런 관습적 행사를 통해 현세의 안녕을 빌고, 사 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잊습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다소 딱딱해 보이는 교단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도 매년 제사와 성묘를 드리면서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후손이 차려주는 제사밥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종교를 갖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중심적이고 쾌락 지향적인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큰 시련이나 한계나 허무함을 느끼기 전에는 종교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한 사 후 세계를 출처 불분명의 전통이나 관습에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토록 광대하고 정교한 우주만물을 만든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2. 무종교의 역사
일본 사람이 이렇게 교단종교를 멀리하고 무종교에 빠지게 된 역사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인도 중세에는 불교 사상을 받아 들여 내세(來世)가 존재함을 믿었고, 죽고 난 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해탈을 통한 구제를 바랬습니다.
부처란 최고의 지혜를 깨달음으로써 두 번 다시 '육도 윤회'(모든 생물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天의 여섯
세계를 계속 순회한다고 믿음)를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도 윤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해 승려가 되어 수행을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번뇌와 욕심을 잘 다스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일본 승려 신란(1173~1262)은 인간이 뿌리 깊은 번뇌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고, 가르침대로 수행을
계속해도 아무 효과가 없고, 허탈한 마음만 남을 뿐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수행보다는 아미타불에 의지해 '나무 아미타불'(아미타불에게 귀의함)만 반복적으로 외우면
지극히 기쁜 세계인 극락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상이 유행했습니다.
16세기부터는 이 세상에서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행하면 부처 앞에서 합장하거나, 신사에 참배하지
않아도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는 유교의 사상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래서 살았을 때에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고, 죽고 나서 귀신이 된 후에는 후대의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외워 주면
지옥에 가지 않고 극락에 간다는 이상한 교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유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가 아니라 현세의 윤리 도덕인데, 현실세계에 대한 유교가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사 후 세계보다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인생을 고통스럽고,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 영원할 수 없다.)하다 하여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현실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상한 인생을 괴로워 하지 말고, 그 자체를 즐기자는 '부세'(浮世, 확실한 중심이 없이 물 위에 둥둥
떠 배회함) 사상을 갖게 됩니다.
16세기의 시가집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어차피 덧 없는 꿈 같은 인생 마음껏 하고 싶은대로
즐기며 살다 가자는 시가 많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향락적인 인생관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16~17 세기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대해 사람들이 생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잊기 위해 지옥이 꼭 고통스러운 곳이 아니고,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며, 지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것에 의심을 품는 회의론적인 사상을 갖게되고, 어차피 확실히 알 수 없다면 실컷 성적 쾌락 등을
즐기다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래도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는 없기에 종교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고, 현세에는 즐기며
살다가, 죽고 나서 후손이 아미타불을 외쳐 주어서 극락에 가겠다는 타협점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의(葬儀) 불교'로 부세의 삶이나 무종교와도 융합되는 일본 특유의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의(葬儀) 불교'에서 장(葬)은 '장사할 장' 자입니다.
장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고인에게 법명(法名)을 주어줍니다.
법명은 대체로 성씨를 석(釋)으로 주어 '석○○'으로 불리는데, 석은 석가의 석과 같은 자로, 원래는 생존 시에 불교도가
된 증표로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장송(葬送)이 불교 의례로 행해지고, 승려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위한 법요(法要)가 이루어집니다.
1주일 간격으로 법요가 이루어져 주로 49제가 행해지며, 백일제와 1주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보통 33회기로 종료됩니다.
49제는 인도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백일제나 1주기 3주기는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며, 7 13 17 25 33회기는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고, 50 100회기는 정토진종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후손은 매년 고인이 죽은 날에 승려를 불러 독경을 하고, 집에 불단과 위패를 모셔둡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도 가문의 일원이 되어 제사를 받게 된다는 '이에' 사상이 퍼지고, 장의불교가 이를 뒷받침 하게 됩니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크리스천 금제(禁制)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모든 가구는 불교 사원에 소속되 있어야 하고,
소속된 절로부터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장의불교는 민중의 호응과 막부의 지원으로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원래 불교에는 죽은 자를 위한 제사가 없으며, 석가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장례는 고향사람에게 맡기고
수행에만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인도에서의 불교식 장례는 화장할 때 간단한 경문을 읽는 것으로 끝납니다.
불교가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본인들은 원래의 종교를 자신의 편의대로 변질시켜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는데 능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변질은 비단 불교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카톨릭이나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진리를 변질시켜 사람이 만든 교리를 신봉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연옥 사상을 만들어 내었고,
기독교에서도 진리와 희생은 외면한 채 복 받기만 바라는 기복주의나 은사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3. 퇘색한 종교관
일본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정권 유지와 권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보급시키거나 핍박한 특징이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신분에서 벗어나 국가의
구성 일원인 '국민'이라는 자격을 선택하도록 강요 받았습니다.
'국민'은 국가 구성원으로서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니는 대신 선거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존재입니다.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정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왕을 신성시 했고, '대일본제국헌법'에서
민중을 '국민'(國民)이 아닌 천황에 종속된 '신민'(臣民)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프러시아를 근대 국가의 모델로 정하고,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의 주권자로 삼았으며, 천황이 일본의
절대적 지배자라는 것을 신민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의 대규모적인 국민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같은 역사책을 통해 천황이 신의 자손이란 신화를 믿게 했고, 신의 자손만이
일본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이데올로기를 보급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도쿠가와 막부에 이어서 메이지 정부에서도 금령(禁令)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천황의 신성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서양 열강의 압력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처럼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기독교 금령을 시행하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교묘한 기독교 방해 전략은 기독교를 개개인이 마음으로 믿는 것은 허용하지만, 선교나 출판이나 설교 등
표면적인 활동은 금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종파를 초월해 기독교나 불교나 신토 등을 하나로 다룰 개념이 필요해 1874년 '종교'(宗敎)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일정한 교리와 체제를 갖춘 기독교나 불교 같은 교단종교를 말하며, 자연종교는 제외됩니다.
따라서 일본인들 사이에는 교단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종교'라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신민이 천황에게 절대 충성해야 하는 존재임으로 전 생애에 걸쳐 국가의 법률을 따라야 하며,
종교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허가 없이 종교 시설을 세우거나 종교 행사를 갖는 것은 법적인 규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4. 천황숭배의 실체
메이지 정부 이전에 천황의 존재는 권력 없이 미약한 존재였고, 민중 역시 천황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이 절대적 지배자이고, 신민은 천황에게 절대 복종해야 된다는 이념을 국민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천황을 신성시 하는 이론이 종교 교리처럼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천황은 '아마테라스오 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의 자손으로 강조되고, 천황에게는 '아마테라스오
오미카미'에게 제사드리는 것이 최대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천황은 이제까지 한번도 참배한 적이 없던 '이세 신궁'(천황가의 씨족신을 모시는 신궁)에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천황의 제사는 국민이 각자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로 이어져 국가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신성시하는 가르침을 국민에게 널리 전파하기 위해 포교사(布敎師)를 전국으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교부성(敎部省)이란 관청을 설치하여 전국의 신주와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하고, 그들을 동원하여
천황 숭배 사상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통해 국가 이념을 종교화해 권력을 강화하고 민중의 지배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지식인들은 국가가 종교를 인위적으로 퍼뜨리는 것을 항의했고, 불교측에서도 천황숭배를 신토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 유학중이었던 시마지 모쿠라이는 정치와 종교의 구별이야 말로 문명국의 조건이라며, 국가가 종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국민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미대리공사(駐美代理公使)였던 모리 아리노라도 교부성의 국교 제정에 반대하고, 종교는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신앙은 인간의 천부의 권리임을 역설하였습니다.
교부성의 신불(神佛) 합동 방식은 신토의 국교화를 추진하려던 신토측에서도 반발하였으므로, 교부성의 국민교화운동은
모든 종교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결국 교부성은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국민교화를 중단하지 않고, 교묘한 궤변을 거듭하며 국민들 사이에 침투하였습니다.
결국 신토는 종교가 아니라는 '신토비종교론(神道非宗敎論)'을 주장해 자연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열등한 종교 내지는
전통이나 풍속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천황을 절대시 하는 신토를 신앙의 자유라는 명목 때문에 국교화 할 수 없다면, 신토를 종교로 간주하지 않으면 됩니다.
신토를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신토를 강요해도 신앙의 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토는 종교가 아니라 관습적인 제사의식으로 천황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국민에게 공로가 있었던 신하의
영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도(道)라고 홍보하게 되었습니다.


5. 불교의 변질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절대시 하는 신토론으로 무장하고, 제정일치와 신불분리(神佛分離) 정책을 시행해 불교를
배척하였습니다.
이러한 노선에 큰 타격을 받은 불교 교단(정토진종)은 살아 남기 위해 신토비종교론을 흡수하여 신토를 인정하고
융합하였습니다.
막부 정권 하에서도 봉건적 질서를 준수해 살아남았던 정토진종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신자는 먼저 국가가 요구하는
충실한 신민이 되야 한다는 교의를 제정함으로써 타협합니다.
이로써 정토진종의 종교적 수행은 이차적인 것으로 전락하였고, 정토진종은 신토의 신들을 섬기게 되었으며,
국민에게 태평양 전쟁 협력을 종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6. 결론
일본의 종교는 민중의 편의와 정치적 목적 하에 심하게 변질되었고,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 후 세계를 보장할 수
없는 출처 불분명의 관습적인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우리와 같은 셈족으로 종교성이 강하기 때문에 영적 갈망을 해소하지 못하고, 광적인 취미생활이나
변태 엽기 등 빗나간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영들림 현상이나 우울증 등 정신병과 자살도 증가 추세에 있고, 엽기적인 강력범죄도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 우동 가게는 손님이 칸막이가 쳐진 곳에서 종업원 얼굴도 보지 않고 주문해 혼자 어두운 곳에서 먹게 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자폐증적인 증상)
하루 속히 많은 일본인들이 무종교와 천황숭배의 실체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 들여 하나님을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개인 신앙의 발전단계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 무의식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다 사춘기가 되면 자아를 인식하게 되고, 인간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민에 빠집니다.
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나의 사후는 어떻게 되나?' 등 근원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도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고, 결국 명확히 알 수 없다는 회의론에 빠지거나, 알아야만 한다는
집념을 불태우게 됩니다.
회의론 부류의 사람들은 인생을 실컷 즐기다 가자는 쾌락주의나, 모든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염세주의에 빠집니다.
알아야겠다는 부류의 사람은 철학이나 불교처럼 자력으로 해결하겠다는 사람과 기독교처럼 신을 의지하겠다는 부류로
나뉩니다.
그러나 자력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해답을 얻지 못하고 인간의 여러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무리 수련을 하고 지식으로 무장해도 자신의 불안하고 죄악된 마음 하나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교만하기 때문에 철저히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애타게 신을 찾게 됩니다.
결국 인생에 있어 고민과 시련과 고통이 많은 사람일수록 구원 받을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지게 됩니다.

* 참고 서적: 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 (아마 도시마로 지음, 정형 옮김, 예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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