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7일 월요일

엔드류 머레이-2

엔드류 머레이-2

십자가에 못 박힘

앤드류 머레이 씀 / 정 중은 옮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기어 있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더불어 교제하고 그 죽으심의 모든 축복과 권능에 참여하는 확신을 위와 같이 표현합니다. 이는 참으로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는 사도의 진정어린 고백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이 같은 주님과의 연합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그분의 죽으심을 진정 나의 죽음으로 여길 수 있음은 곧 하나님께 대한 주님의 온전한 순종, 죄를 이기신 그분의 권세로부터 오는 온전한 구원을 나의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권능이 매일 나의 육신을 죽이는 신적인 권능으로 역사하는 것을 믿음으로 깨달으며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합당하도록 나의 모든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새로 태어난 생명이 본성의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도록 힘씁시다.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라는 암시적인 표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접붙인 가지와 원 가지가 연합할 때 그것들을 단단히 고정하고 묶어서 접붙인 가지가 원 줄기가 잘린 상처 입은 자리에서 자라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래야만 거기에서 새로운 가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적 생명 안에 다른 가지를 받아들이도록 몸을 찢고 맨 살을 드러내는 상처가 없이는 접붙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러한 상처를 통해서만 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며, 보다 더 튼튼한 가지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죄인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심겨질 때에야 비로소 그분 안에 있는 생명과 권능에 동참하는 자로서 그 부활의 형상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리스도는 상처를 입었으며 그분의 열려진 상처 안에서 우리가 접붙임을 받을 수 있는 처소가 예비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접붙임을 받는 가지를 그 자리에 고정시키면서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이곳이 앞으로 너를 키워줄 곳이니까 이 상처난 곳에서 살아야 한다.” 주님을 믿는 심령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상처에 거하십시오. 그곳은 연합과 생명과 성장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주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마을을 열어놓고 계신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그분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분의 몸이 찢겨진 것을 보게 되며, 그분의 신적 성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그 본래 자라던 줄기로부터 다른 가지에 맞도록 잘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믿는 이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알맞도록 깎여야만 합니다. 상처가 난 가지들은 서로에게 알맞도록 깎여져 맞추어집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당신의 고난 사이에도 교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체험이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견디시고 또 십자가를 선택하는 데서 드러내신 특성들이 또한 당신의 것이 됩니다. 죄에 대하여 당신은 주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와 의로운 심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순종하신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죄와 저주의 짐을 진 당신의 생명을 주님처럼 죽기까지 포기하여 새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겟세마네와 갈보리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이 주님처럼 부활 생명의 열매를 맺고 기쁨을 얻는 길을 찾게 됩니다. 접붙임을 받는 가지와 상처가 난 원가지 사이에 유사성이 많을수록 서로 상처가 더욱 쉽게, 확실하게, 완전하게 연합하여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하나님께 대한 속죄로서 바라볼 뿐 아니라 마귀를 이긴 승리로서 보아야 합니다. 또한 죄책으로부터의 구원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와의 밀접하고 친밀한 연합과 교제를 위하여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으신 권능에 동참하는 자가 되도록 십자가의 주님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새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간절한 소원을 품고 일편단심으로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죽으심과 성령 안에서 하나로 일치된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자신을 주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가 왜 연합의 장소가 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과의 충만한 연합으로 들어오셨으며, 그리하여 십자가 위에서 저주 아래 있는 족속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실을 마음껏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생명의 왕자이신 주님께서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나누어 주신 생명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의 교제를 통하여 그 생명의 권능을 체험합니다. 죽음과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을 주님의 자리에 내놓고 그곳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처소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지만 나는 죄로 인한 저주를 받아 거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찾아 오셨지만 나는 오직 그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있는 나를 찾아 오셨을 때 그곳은 저주의 장소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저주를 체험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축복의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내가 그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우리를 저주로부터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셨을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성부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나와 교제하시면서 나의 저주와 나의 죽음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직 자연 그대로의 모든 악한 본성을 지닌 채 죽어 마땅한 자로서 주님의 자리에 섰을 때, 주님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하나가 되고자 오셨을 때, 그분은 부득불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주의 최종적인 목적과 결과는 항상 십자가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자 할 때 나는 십자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곳에서는 생명과 구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을 저주 때문에 주님께서는 부득불 나와 온전히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십자가로 향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축복 또한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십자가를 통해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십자가를 그분 자신의 것으로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분의 십자가를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 거하여 그분의 달콤한 사랑의 맛을 보고 그 생명의 권능과 그 구원의 완전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같이 깊은 신비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고 거기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주님과 교제하고자 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이 그분과 교제하도록 초대하신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또 세상의 자녀들과 함께 겪어야 하는 인생의 일상적인 질고를 견디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것을 의미함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모든 육체의 욕망과 쾌락을 완전히 부인하며 모든 언행심사에서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여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고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자의 특성을 말해주는 표가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당신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이 그 은혜로 지키시는 데로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려고 합니까? 성령님께서 이 비밀스러운 복된 진리 속으로 인도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아직 십자가의 걸림돌이 되어 있을 때에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17, 21, 23). 우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과 새롭게 하시는 생명을 가지고 십자가 아래 거하면서 주님이 의도하시는 온전한 장성(長成)의 목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주님과 교제하는 삶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구주 예수님!
당신을 믿는 것뿐 아니라
당신 안에 거하는 것도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하여 용서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생명의 법인
주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밀접한 교제를 나누며 함께 못 박히도록 한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가르치사 성령 안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그 성령이 우리를 온전히 소유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축복과 권능에 동참하게 하소서.

-앤드류 머레이 씀 「주 안에 거하라」(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발췌-



 기도하지 않는 죄

                                                                                                                                                               -앤드류 머레이

살아 숨 쉬는 양심과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자기 죄를 낱낱이 아뢸 필요가 있습니다. 고백은 철저히 자신과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우리 목회자 각자가 부끄럽게, 아니“죄스럽고도 참으로 죄스럽게” 고백해야 할 죄는 아마도 기도하지 않는 죄일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큰 죄이겠습니까? 처음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단지 결점으로만 생각됩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잡다한 일이 산재해 있다고 말할 뿐 기도하지 않는 상황이 심각한 죄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죄가 진정 죄로 느껴지기를 바라십시오.


1.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우리를 초대하시는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초대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하나님과 친교 하는 데 따르는 축복을 맛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자신의 외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는 최고의 영광과 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늘의 특권을 얼마나 누립니까? 기도에 겨우 5분을 할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시간이 없다고, 기도하고픈 마음이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 30분도 하나님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그들이 전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증거이자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기도에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친구가 방문했을 때, 그들은 친구와 대화할 시간을 내며, 그 대화를 즐기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라도 애써 시간을 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흥미를 가진 일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고를 나누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피조물에게는 시간을 내지만,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점점 하나님과 지낼 시간은 단 한 시간도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친고를 나눌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큰 치욕을 안겨드리는 것입니다. 이 죄를 뚜렷이 알게 되면, 우리는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외치지 않겠습니까?

“화있을진저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시어, 기도하지 않는 이 끔찍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 삶이 병드는 원인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우리 삶이 여전히 “육체”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생명의 맥박입니다. 의사는 맥박을 검사함으로써 심장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목사나 교인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본연의 소명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는 불평이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세상의 권세로부터 교인들을 구하지 못한다는 불평, 또 하나님께 헌신하는 거룩한 삶으로 교인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라고 말씀하셨건만, 교회는 수백만의 믿음 없는 자들에게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수천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사역에 기도를 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연구와 교회 일에 쏟는 그들의 열정 한가운데에, 설교와 대화에 임하는 그들의 모든 성실함 한가운데에 끊임없는 기도가 있어야 하건만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의 기도에는 성령의 약속과 하늘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영적 삶에 능력이 없는 이유는 오직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목사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교회는 엄청난 손실을 당한다.
 
신자에게 기도하는 삶을 훈련시키는 것은 목사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에 거의 무지하고, 날마다 성령으로부터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자기 수준 이상으로 교인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목사 자신이 가는 길이 아닌 이상, 열정적으로 어떤 길을 제시하거나 어떤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친교인 기도에 대해, 기도의 축복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기도의 축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은 기도의 축복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는 자극을 설교에서 지속적으로는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사가 능력 있는 기도의 비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목회 현장에 기도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본질적으로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를 목사가 직시하고 그 죄에서 해방된다면, 우리 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있겠습니까!


4. 이죄를 극복하고 버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을 이룰 수 없다.

이죄를 극복하고 버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선교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주님께 헌신하여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 기도할 사람들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목회자들 안에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설교, 심방, 교회업무가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여 마침내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밤낮으로 기도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일하고 바랄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죄를 뽑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와 능력을 통해 그 죄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 이 죄를 지으면, 주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 마음을 누르소서.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우리가 이 죄에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도학교'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앤드류 머레이

성경을 필생의 안내자로써 진실로 믿는사람들 중에도 보혈과 성령에 대한
온전한 가르침을 바로 아는 사람이 참으로 드물다는 게 슬픈 사실입니다.

기초가 된 것은 그리스도에게 온 죽음이었고
충만해 지는 것은 우리 안에 나타날 그분의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으셔서 베푸실 수 잇는 것은
그분의 피 흘림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세례는 사역을 위한 능력으로써 특별히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경우 성령세례가 지속되려면 주님을 증거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성령세례는 생명의 순환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신령으로란 말은 영 안에서란 뜻입니다.
영 안에서란 말은 성령 안에서란 뜻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진리와 능력이 되게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만의 사역인 것입니다.

또 성령 없이 말씀에 정통하면 극히 육신적인 사람이 됩니다.
즉 겸손과 온유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가라지와 같은
신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한다면
자연적으로 말씀이 전해 주고자 하는 축복에 이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입니다
신학박사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옛 성현들이 말한 성경말씀은
같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말씀과 영원하신 성령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성령의 임재가 곧 구원입니다.

우리는 단지 십자가와 죄의 용서를 신뢰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온전한 데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결국 타락하고야 맙니다.

성령이 주어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인격이 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계시면서 행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대신해 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가 마음 중심에 들어갈 때 그것은 영의 생명이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의 영은 하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혼의 외적 부분들, 즉 지식과 이성에만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진리가 그 외적 부분 안에 자리잡고 거기서 그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우리를 만족하게 해줄 때 그러한 진리란 인간적 주장과
인간적 지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영의 참된 생명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이나 선이 없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아무런 지혜가 없다는 고백을 동반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볼 수 없었고
세상에 대하여는 그것이 감추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모든 것이 소망이 없고 공허함을 느낄 때
성령께서는 은밀히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신 자 곧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그분의 처소를 정하셨음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신자는 말없는 경배와 찬미 가운데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게되고
마음속의 그분의 보좌가 공의 가운데 세워짐으로써
"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는 약속이 이제 성취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위대한 사역 중의 하나는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계시하시되
생각이나 기억 속에 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마음 중심에,
그리고 우리의 생명과 경험 속에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죄는 불 신앙, 곧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상의 영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각자의 희생 제물에 죽음이 있어야 하는 데
이는 자아와 그 능력을 죽음에 내어주고 희생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여러분이
그 존귀하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거룩한 침묵 가운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즉
[올바르게 기도할 지혜도 없으며 올바르게 행할 능력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보시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결핍의 표현이고 비어있음의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주와 함께 죽었음의 표현이고 거짓 없는 낮아짐의 표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가난함과 연약함에 대한 의식과
부러울 것이 없는 부요와 능력의 기쁨은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시고 율법의 마침이셨던 것처럼
성령은 모든 복음의 완성자이시고 성취자이시며 유효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연약한 것들 속에 감추시는데
이는 육체가 그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신 세계 그것이 신앙인이 가는 목적지입니다
연약한 가운데도 이 한가지 목적에 충실하여 순종과 증거가운데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기꺼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려는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이나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 기대와는
상반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능력이 우리의 소유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신자의 영혼구원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신자의 몸의 구속을 거쳐 만유를 구원하는데 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다 얻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자들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종의 학교에서
앤드류 머레이
그리스도의 순종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빚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아담안에서 죄인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 된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의를 빚졌다는 뜻이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든다.
(나는 순종할 능력이 없는것을 하나님이 더잘아시는데
나보고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이루신 예수님의 순종을 믿음으로
그믿음을 의로 여김받아서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우리는 그안에 들어가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으로 얻은 보화중 가장 보배로운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이 의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충만한 복음을 얻도록 연구하는일을
하지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의의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의의능력에
참예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의 진리를 잘알고 있을 것이다.
로마서3:21-5:11에서 바울은 다음의 여러가지 진리를 가르쳤다.

첫째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다.
둘째 칭의의 방법과 조건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를 믿는 믿음이다.
셋째 칭의의 복된 결과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것이며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갈 수 있는것이며 영광의 소망을 소유할 수 있는것이다.

이제 바울은 로마서 5:12절 이후부터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깊은 진리를 주해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의 근거이며 이 연합이 있어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를 용납하실수 있는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자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을 공유하는것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입증하기위해  바울은 아담과 우리와의 연합과 그연합으로 말미암은 결과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아담의 불순종 그로 말미암은 정죄와 죽음과
그리스도의 순종,그로 말미암은 의와 생명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차지하는 위치를 연구하여
그순종이 우리의 구원의 뿌리라는 사실을 보게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가운데 순종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할지 알게 될것이다.

아담의 후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것같이"(롬5:19)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가?

아담과 그의 후손사이는 이중의 관계 즉 '법정적 관계'와 '생명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

법정적 관계를 통해 모든 인류는 비록 태어나지 않은 자라 하더라도
죽음의 정죄선고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

이 법정적 관계는 생명적 관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인간이 아담안에 있지 않았다면 정죄의 선언이
그들위에 임할 수 없었을것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적관계는 법정적 관계의 현시가 된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와 사망의 능력안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의 저주아래 있다는 사실과 그본성이 죄의 능력의 영향을 받을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자들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여기서 '오실 자'란
두번째 아담 인류의 두번째 조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담의 불순종과 그결과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순종이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를 비슷하게 보여주는 모형이다.

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단번에 법정적인 선언에 의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선포되고 용납된다.

번정적 관계는 생명적 관계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만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정적 관계 이전의 생명적 관계를 필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담의 불순종애 참여하여 사망과 죄악의 성품을 물려받은 것이
실제적인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의 삶과 성품을 얻게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우리가 죄인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 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요구한 한가지는 순종이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향유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순종뿐이다.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고 파멸을 가져온 하나의 이유는 불순종이다.
우리에게 온갖 죄의 자주가 임한것은 불순종이 우리에게 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능력이란 다름아닌 바로 이것 즉
우리가 아담의 본성을 받고 그의 불순종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불순종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있는것이다.

둘째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로인한 저주 지배권 악한성격 악한역사를
제거 하셔야만 했다.

불순종은 모든 죄와 불행의 뿌리였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번째 목표는 악한 불순종의 뿌리를 잘라내고 인간을 원래의 위치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이일을 하셨는가?
우선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째 아담이 해놓은 결과를 제거 하심으로
이일을 이루셨다.

죄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애쓰는것은
굴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고귀성과 측복성과 신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을 때 우리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순결성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못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의 옷을 입는 입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순종의 옷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이기고 제거하신 후에 자신의 순종으로
우리 안에 우리 위에 대치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아담의 불순종이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순종의 능력이 더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의 목표는 세가지다.
첫째로는 진정한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본보기가 되시며
둘째로는 그분의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성취하시는 보증이 되시고
셋째로는 우리에게 순종하는 새로운 성품을 부여하시는 머리가 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다음의 여러가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
둘째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하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망에 대해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순종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터준 것이다.

법정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
우리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인이 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순종으로 죄와 사망의 능력으로부터 단번에 완전하게 구출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즉 우리는 하나님앞에 의인으로 서게 된 것이다.

생명적으로-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정적관계와 생명적 관계를
분리할수 없기 때문인데-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다름아닌 순종의 생명인 것이다.
순종의 삶을 원하는 이들은 이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하는 의와 구원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있다는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순종은 그리스도의 의의 정수이다.
다시말해 순종이 곧 구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을 덮고 종지부를 찍는것으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며 신뢰해야 하며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는 불변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망의 능력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안의 새로운 본성인 생명의 능력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바울이 이구절에서 의와 생명을 밀접히 관계시키고 있는지
그이유를 알게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7-18)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유사점을 더 세심하게 살펴보고 첫째아담의 경우
사망과 불순종이 그자신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아담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인간이 사망과 불순종의 지배를 받게 된 사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볼수록 그리스도의 순종도 전가뿐 아니라 개인적 소유 행위로 인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더욱 큰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스도와 순종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의는 단번에 순종을 가리키게 된다.
의는 순종에서 나왔고 순종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순종안에서만
번성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계는 로마서 6장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은 생명의 연합에 대해 언급한 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그런다음 바울은 이것이 바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실제적 순종

우리의 순종과의 관계는 매우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순종(아담=원죄 우리자신의 불순종=자범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이제 순종의 종 즉 '의에 이르는'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의,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의에 이르는 순종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의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한다.

의에 이른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머리와 지체에는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있을 뿐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불순종과 죽음이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후손의 순종과 생명도 분명한 사실이다.

아담과 그 후손사이의 한 연결점 즉 유사성은 불순종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후손사이의 연결점 즉 유사점은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실수가 있었고 결국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세주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직 순종이 있어야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즐거워할 수 있는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모든것은 순종을 '의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길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했느냐'
의 여부에 달려있는것이다.

회심하는 순간에는 의가 단번에 완전하게 신자에게 주어진다.
이때는 순종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못하거나 전혀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의를 믿고 복종하게 되고 '의의종'으로서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의가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는
의의 신적속성까지도 알게 된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진실하게 붙잡으면 붙잡을 수록
의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순종에 동참하고 싶은 열망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가끔하는 순종의 한 행동이나 일련의 순종의
행동들이 아니라 그분의 온 삶의 정신이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8-4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주님은 한가지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려는 한가지 목적으로 이땅에서 사셨다.

그리스도의 삶을 지배하는 한가지 최상의 원동력은 순종이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같은 사실이 다음의 약속에 들어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한 가족을 잇는 고리는 모두가 공동의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과 유사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사이의 연결성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순종은 '기쁨'이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활력을 북돋아 준다.
건강한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음식은 단지 즐기는 것만은 아니다.
음식은 생명의 필수적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것은 그리스도게서 굶주려 하셨던 음식이었고
그것없이는 살아나가실 수 없던 양식이었으며 그분의 허기를 채운 음식이었고
그분을 새롭게 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즐겁게 한 양식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한것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순종이 우리의 일상 음식보다 더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더 활력을 불어놓는 영양분임을 깨닫게 될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뜻을 그리스도에게 단번에 가르쳐 주시지 않고
상황에 따라 매일같이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에는 성장과 진보가 있었다.
따라서 가장 어려운 교훈은 가장 늦게 나타났다.

그리스도게서 순종의 행동을 하실때마다 하나님은 또다른 명령을
하나씩 더 열어 보여주셨다.

성령에 의해 우리의 귀가 열려져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기다리는 정도가 되려면
우리의 삶에 순종의 열기가 가득해야만 하는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만을 최대의 만족을 느끼려면
순종이 우리의 삶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죽음에 이르는것'이었다.
주님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하심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것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각오가 돠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였다.

"내 뜻은 전혀 구하지않고 무슨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만 행하리라"
이러한 순종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참된 순종인 것이다.

모든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이러한 순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순종인 것이다.

이러한 순종만이 우리가 끝까지 순종할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진정한 기쁨과 능력을 맛볼 수 없다는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전적인 순종을 의심하게되고 더 나아가 순종을 행할 능력에 자신이 없는 한
승리할수 있다는 확신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고 그 순종을 실천하도록
지시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앞에 드릴것은 온전한 순종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성령을 통해 삶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에
우리자신을 맡길 수 있게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깊은 겸손에서 우러나온것'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사람 종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 '순종의 종'
하나님과 인간앞에서 자기를 낮추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이
그천상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드러나게 보여준다.

자기자신을 믿고 순종해 보려다가 실패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더러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자기를 버리고 전적인 무능력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의지할때
그러니까 겸손함과 온유함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면서
하나님앞에 글복할때만 영광의 하나님께 복종는것이 인간의 의무요
동시에 축복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한 데서 이와같은 순종이 나온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성자께서 성부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시자 성부께서는 성자안에
그분의 능력을 무한정으로 부어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을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안에 그분의 능력을
부으시는 정도를 축정하는 잣대라는 사실을 배우게되면 온전한 순종이란
하나님이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실것이라는 온전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새언약의 모든약속들은 이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30:6-8)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7)

우리모두 성자처럼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도 무조건적인 순종
죽음을 각오한 순종을 할수있는 용기가 생길 것이다.

이같은 순종은 성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성부의 뜻을 행한
성자와 같아질 수 있는 복된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많은이들이 순종은 한분 즉 성자의 순종에 그 뿌리와 생명과 안전이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순종의 모델로 바라보고 연구하고 믿도록 하자.

우리가 영접하고 사랑하고 똑같아 지도록 애써야 할 그리스도를
바로 순종의 그리스도로 삼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희망인 것처럼 그분의 순종을 소원으로 삼도록 하라
순종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즉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역사하신다는 점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앤드류 머레이목사님의
순종의 학교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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