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2일 수요일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노동자의 영원한 벗’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노동자의 영원한 벗’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그의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독일 기독교계의 두 거성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을 때, 두 인물을 추모하고
평가하는 의미를 가진 ‘과거와 미래(Vergangenheit und Zukunft)’라는 신학적 수상을
발표하였다.
그 두 인물은 프리드리히 나우만과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목사였다.
이 두 목사는 개교회 목회사역만으로는 산업화 과정 가운데서 끊임없이 분출하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던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카를 바르트는 이 두 사람의 삶을 조명하면서 한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Ja)을,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니오(Nein)
라고 선언했다.
그가 ‘아니다’는 평가를 내렸던 인물은 나우만이었다.
나우만은 기독교 사회민주당의 창설에 공헌했고 사회적 명성이 쟁쟁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나우만의 삶은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의 길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판단했다.
나우만의 삶에서는 예수의 복음이 민족 중흥이나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상대화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그의 삶은 현재가 되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면에 바르트는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삶과 사역 가운데에는 예수께서 2000년전에 시작했던 복음운동이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침묵하게 될 것이고 그는 그의 생애에서 무엇이 문제의 중심이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살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미래의 승리를 위해…”

바르트가 ‘과거에 대한 미래의 승리’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어떤 인물인가.

블룸하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독일 남부 경건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난 1842년 산골마을 뫼트링겐 교회의 목사로 부임한다.
작은 시골교회인 뫼트링겐 교회에는 마비와 경련을 일으키는,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고트리빈 디투스라는 여성도가 있었다.
그녀의 병은 함께 살고 있는 두 자매에게도 전이되어 세 자매가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세 자매의 일은 뫼트링겐 교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블룸하르트 목사는 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심방하면서 자매들 가운데 악한 영이 작용하고 있음을 관찰한다.
그 날도 블룸하르트 목사가 자매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던 중에 막내인 카타리나의 입에서
“예수는 승리자!”라는 커다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소리는 이웃집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 순간 세 자매를 사로잡았던 병마가 물러갔다.
이 사건 이후 뫼트링겐은 복음사건의 현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영적 침체를 면치 못하던 교회가 활기를 얻었다. 회개와 치유사건이 이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블룸하르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시골 교회의 형편으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어 그곳에서 멀지 않은 밧볼의 유황온천을 인수, 기도와 치유의
장소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어린 크리스토프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많은 방문객들을 위해서 요리사가 될까 생각하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신학수업을 받을 것을 권했고 아들은 순종했다.

블룸하르트는 1859년부터 7년동안 우르아흐의 신학교와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수업에 전념한다.
블룸하르트는 신학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깨달을 수는 없었다고 후에 회고했다.

아버지에게서 병고침을 받았던 고트리빈 디투스는 가족의 일원처럼 지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디투스가 죽어가는 침상을 지키다가 신비한 경험을 한다.
그의 가슴이 알 수 없는 감격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가 이 세계를 통치하신다!”
알 수 없는 확신이 그의 전 존재를 휘어잡는다.
그 순간에 체험했던 확신은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다.

크리스토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무런 단절없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입을 열면 성경의 말씀들이 새로운 생명의 불꽃이 되어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그에게도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스스로도 말씀의 능력이 일으키는 역사에 놀랄 정도였다.
이 당시 밧볼을 찾아 그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 중에는 카를 바르트,에드워드 투르나이젠,레온하르드 라가츠 등 이후
20세기를 이끈 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탁월한 신학을 제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블룸하르트의 인격적인 감화와 신학적인 영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크리스토프는 그리스도인은 두번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첫번째 회심은 그리스도안에서 이고, 두번째 회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가운데로 나아감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한가로운 사변 가운데서 얻어진 명제가 아니었다.
체험으로 얻은 진리였다.
블룸하르트는 병든 몸을 이끌고 그를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보았다.
그가 살고 있던 괴핑겐 지역은 당시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블룸하르트는 예수께서 시작하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곳 노동자들처럼 버려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런 복음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노동자들의 고난에 참여하는 두번째 회심을 체험한다.
당시 독일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양극화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제국의회가 시도한 노동자 탄압법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해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과시한다.
사회민주당의 집회에 참석한 블룸하르트는 이렇게 연설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노동자편에 선 것에 대해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비천한 자에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한 것은 그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2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을 그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누군가 내가 프롤레타리아가 되기 원해 프롤레타리아 편에 서는 것을 비난한다면 나의 신앙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인간은 모두 한 형제와 자매입니다”

존경받는 블룸하르트 목사가 노동자편에 섰다는 선언은 세상을,독일을 뒤집어놓았다.
거의 모든 신문이 이 일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이 일로 블룸하르트 목사가 감당해야 했던 곤욕들에 대해서는 서술할 지면이 없다.
그는 목사직을 내놓아야 할 곤경을 겪었고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블룸하르트는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갔다.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교육제도 개혁과 복지정책의 구현을 시도한 것이다.
그의 의회 정치활동은 그의 나라와 함께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대망하는 신앙의 연장선에 있었다.

블룸하르트는 한시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멈춘 적이 없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암운 가운데서도 “이 세계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1917년 9월29일 그는 이사야서 49장 7∼13절 말씀을 빗대어 이렇게 설교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위에 한 빛이 약속되어 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의 빛 가운데 거닐
수 있습니다. 때로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살아 있고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 가운데 행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아직도 그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블룸하르트가 지상의 사랑하는 공동체에 행한 마지막 증언이었다.
그는 1919년 8월2일 기도하는 가운데 이 땅의 삶을 마감했다.
그는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아멘”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밧볼에 있는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예수는 승리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원배 <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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