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아우구스티누스 - 시대를 비추며 깨운 ‘위대한 통찰’

아우구스티누스 - 시대를 비추며 깨운 ‘위대한 통찰’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돈과 명예, 정욕의 사슬에 매여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드렸던 이 기도는 죄에서
자유롭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현대인의 심정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정원의 무화과나무 아래서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고 회심하여 자신의 과거와 단절한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인물인지 질문을 던지면 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젊었을 때 방탕한 자였으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회개해 성자가
된 사람이지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와 세계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도 심오하다.
그는 고대교회의 위대한 교부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요 역사가 수사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였으며
정치철학자였고 저술가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로마제국의 일부였던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 다가스테(현재 알제리 동부의 수카하라스-
Souk Ahras)에서 354년 11월13일 태어났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자라면서 예수의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의 중심도시 카르타고(현 튀니스)에서 공부하던 중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철학적 순례의 길에 빠져든다.
선과 악의 문제를 탐구하다 마니교로 개종하는가 했더니 로마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동안 아카데미파라는
회의론자들의 영향으로 마니교의 이원론을 비판하게 됐다.
386년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보내진 그는 그곳에서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들으며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이해하게 됐다.
당시 밀라노에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도 영적인 존재가 있음을 납득케 하는 역할을 했다.
그 해 초여름 그는 회심의 사건을 경험한다.
당시 서로마 제국에 퍼져 있던 마니교는 유물론적 이원론이었다.
세상을 빛과 어둠의 투쟁의 산물로 보고 인간의 영을 어둠 속에 있는 빛의 요소로 보았다.
마니교는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옥에 갇힌 자녀들을 탈출시켜 본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해방자로 보았다.
마니교회에서 '선택된' 고위 성직자들은 철저히 금욕적이고 독신이었다.
육적인 것은 모두 어둠의 세력에 봉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9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와 교제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몹시 아꼈다.
그러는 동안 '청자'(聽者)라는 낮은 직책을 마니교에서 얻었는데, 그 직책에는 육신의 약함이 인정되어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계몽의 종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환멸을 느낀 그는 꽤 널리 퍼졌던 반(反)영지주의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28세경 그동안 자유교사로 수사학을 가르치던 카르타고를 떠나 더 나은 학생을 찾아 로마로 갔다.
친분관계를 통해 그는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에서 정식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성직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소개받았으나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러 갔고 거기서 그리스도교 지성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편견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는 마니교를 버리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유물론적 전제들이 남아 있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마니교의 교리를
대체할 만한 답을 발견하지 못한 채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설교를 들은 후에도 하나님의 존재, 죄의 본성과 기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저술을 접하면서 그 2가지 문제를 동시에 풀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통해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3세기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플로티노스에게서 비롯된 신플라톤주의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 인정하는 영적
일원론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절대 단일체로부터 일련의 유출과정을 거쳐 이룩되었다고 한다.
초월적인 일자(一者)에게서 자의식을 가진 정신이 나온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부터 영혼 또는 생명이 나온다.
영혼은 정신과 육감 사이에 있는 매개물이다.
물질은 일자의 가장 낮은, 최후의 산물이다.
한편 일자는 실재이면서 선이기 때문에 악의 잠재성이란 결국 일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물질이되 무형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악이란 모든 사물의 최소한의 가능성이요, 선의 결핍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신플라톤 신비주의에는 내면이 외부보다 우월하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므로 선에 이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 정신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백론〉제7권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같은 내면화를 거쳐 하나님을 발견한 대목이 나온다.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변하지 않는 빛'인 하나님은 우리의 직관을 통해 진리와 선을 알려주는 근원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발견은 합리적인 추리의 결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체험이요, 환상이며, 왔다가 사라지는 접촉이었다.
하나님의 발견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랜 의문이 풀렸다.
하나님은 빛이며 악은 어둠이다.
그것은 마니교에서 말한 바와 같지만 어떤 것도 물질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빛은 순수하게 정신적(영적) 실체이며, 어둠이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이듯이 악은 실체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체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인 것으로 쉽게 사라졌다.
그는 자기가 최고가치를 정신(영적인 것)에 두지 않고 아직 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사실 신플라톤주의는 마니교의 원칙을 더 강화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에게 돌아가려면 육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우선 성적인 욕망에서 즉각 떠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고백록〉 제8권에 나오는 유명한 회심 이야기는 어떻게 그가 동서의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시행했는지, 어느 정도
그가 자기의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를 경멸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육체적 저항은 마침내 밀라노의 정원에서 끝났다.
'집어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소리에 그는 〈신약성서〉를 펼쳐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로마 13:14)
그는 끊임없이 마니교나 펠라기우스주의 같은 이단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라고 할 만한 그의 심오한 사상은 성서주석과 설교집에 들어 있다.
특히 〈시편〉 주석과 〈요한의 복음서〉·〈요한의 첫째 편지〉에 대한 글들이 뛰어나다.
그가 이룩한 신학적 특징은 논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게중심을 뒤집는 일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을 위로 올라가는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죄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교수직을 사임한 그는 이듬해 봄 세례를 받고 388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자활과 명상,
독서와 저술활동을 펼친다.
391년 지중해 연안 도시 히포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강제로 사제 안수를 받고 395년 히포의 감독이 된다.

430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가 쓴 책은 무려 117권.
아우구스티누스를 흠모했던 이시도레는 “그의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가 쓴 책중 대표작만 꼽아도 악을 인간 의지의 왜곡으로 본 ‘자유의지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독된 ‘고백록’,
두 도성의 역사와 의미를 쓴 대작 ‘신국론’, 기독교 교리의 중심을 확립한 ‘삼위일체론’, 성서 해석의 방법론인
‘그리스도교 교양’, 교육철학을 설파한 ‘교사론’,하나님의 은총없이는 인간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은총과 자유의지’와
‘영의 문자’, ‘거짓말 논박’ 등 끝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의 주제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 국가론, 사회와 정치, 역사 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어
현대사회에 제기된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을 다 다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중세 1000년은 물론 종교개혁을 거쳐 근·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모든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거리를 두고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퀴나스가 인용한 교부의 저술 중 80%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었다.
중세 철학의 주제였던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서 “믿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중요
모토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신국론을 베개 옆에 두고 늘 읽었다고 한다.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구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지해 로마가톨릭은 물론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와도 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루터 이전의 루터였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로이트보다 먼저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했고, 주지주의에 대항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이끌고가는
본능(Libido)의 존재를 주장했다.
자크 마리탱, 카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니버 형제, 파울 틸리히 등 현대의 신학자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 생태신학의 한 자락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개발과 파괴의 세계관을 내세운 주범으로 지목하는 모양이나
생태계에 대해 그의 고백은 오히려 현대의 감각을 앞선다.
“나는 이런 것들(피조물)이 존재하면 안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이보다 더 좋은 세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정확히 판단하여 깨닫게 되었으니(존재의 계층에서) 위에 있는 존재(천국)가 아래에
있는 존재(현세)보다 더 좋으나 모든 피조물이 함께 화합해서 존재한 것이 위층에 있는 존재가 홀로 있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고백록 7,13,19)

"악인에겐 그들의 행위 자체가 그들의 원수입니다.
태만이라는 악덕은 안식을 추구하려 하지만, 당신 안에 있는 안식 이외에 더 안전한 안식이 어디 있겠읍니까.
사치라는 악덕은 안녕과 부라 일컬어지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멸망하지 않는 만족이요, 무진장으로 넘쳐 흐르는
결핍을 모르는 풍족입니다.
낭비라는 악덕은 인심이 좋다는 평을 들으려 하지만 모든 선한 선물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탐욕이라는 악덕은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만 당신은 모든 것을 소유하셨읍니다.
질투라는 악덕은 다투어 남보다 뛰어나기를 원하지만 당신보다 뛰어난 자는 없읍니다.
노여움이라는 악덕은 복수를 요구합니다만, 당신 이상으로 올바른 복수를 하는 자는 없읍니다.
노파심이라는 악덕은 사랑하는 자가 뜻밖에 갑자기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고 매우 두려워합니다만
당신에게는 뜻밖의 것, 돌발적인 일이라고는 없읍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을 누가 당신으로부터 떼어놓을 수가 있겠읍니까?
당신 이외에 또 어디서 굳건한 터전에 굳게 설 수가 있겠읍니까?
갈망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던 것을 상실하고 슬퍼하다가 멸망하는 일이 있는데, 당신에게서와 같이 그 마음에도
아무런 손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영혼들이 당신에게로 돌아가기만 하면 순수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찾을 수 있으련만 당신을 떠나 당신 밖에서
찾아보려고 애쓰고 헤맵니다.
당신을 피하여 멀리 달아날 듯이 행하는 모든 자들이 사악하게 당신을 모방하고 급기야 당신을 거스려 큰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당신을 모방하려고 할지라도 당신께서 모든 자연의 창조주이시고 따라서 어느 것도 당신을
완전히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누설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제 2 권 제 6 장" [李景植 譯]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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