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8일 화요일

자유주의 비판-3

자유주의 비판-3
 

자유주의 신학자들

로버트 슐러

기타

자유주의 신학자들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and the Word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i. p. 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p.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Ibid., IV, i, p. 508).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Ibid., pp. 29, 30)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and the Word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of God andthe Word of Man , p. 90).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Ibid., III. 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i.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Ibid., p. 62).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대한기독교서회>, 89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년 3월 30일, 9쪽).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Gos- pel, p. 297).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 thoritythe Bible, p. 14). of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Ibid., p. 16).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Ibid.,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the Romans, p. xxxv).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Ibid., p. 24).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Ibid., p. 7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Ibid.,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The Self and the Dramasof History, p. 93).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Beyond Tragedy, p. 3).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Ibid., p. 7).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 반대론(obscurantism)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Ibid., p. 10).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Ibid., p. 1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Ibid., p. 13).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Ibid., p. 1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Ibid.,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of History, p. 66).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Ibid., p. 29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Ibid., p. 21).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dy, p. 290).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Theology of the NewTestament, I, p. 26).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Ibid., I, p. 27).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The Gospel of John, p. 1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Ibid., p. 28).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Ibid., p. 49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그러나,,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Testament, I, p. 50).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of John, pp. 118, 119).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Theology of the NewTestament, I, p. 50).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여하튼, 아주 초대 교회는, 비록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Ibid., I, p. 51).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Testament, I, p.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Debate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Ibid., p. 14).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Systematic Theology, I, p. 3).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 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Ibid., I, pp. 134, 135).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Ibid., I, p. 141).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Ibid., I, p. 11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Ibid., I, p. 3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Ibid., I, p. 35).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不)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 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Ibid., I, p. 158).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Ibid., I, p. 5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Ibid., I, p. 20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Ibid., I, p. 237).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Ibid., I, p. 245).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Ibid., I, p.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p.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p.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p. 174).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Ibid., III, p. 284).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Ibid., I, p. 252).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 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Ibid., I, p. 263).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超)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Ibid., II, p. 40).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Ibid., I, p. 116).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Ibid., I, p. 267).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 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Ibid., II, p. 29).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Ibid., II, p. 94). ('역설적'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바른'이라는 뜻임.)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Ibid., II, p. 109).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Ibid., II, p. 10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Ibid., II, p. 131).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Ibid., II, p. 17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Ibid., II, p. 153).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蓋然的)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p. 15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probability)--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Ibid., II, p. 155).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Ibid., II, p. 16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Ibid., II, p.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p. 409).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Ibid., II, p. 78).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p. 418).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內面性)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67], p. 15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Ibid., pp. 196, 197).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Ibid., p. 199).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Ibid., p. 153).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Ibid., p. 153).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분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Ibid., p. 156).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the thing itself)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 181).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Ibid., p. 185).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Ibid., p. 186).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p. 210).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이브,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숴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Ibid., p. 65).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Letters from Prison, p. 20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 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Ibid., p. 211).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1955],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Ibid., p. 95).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 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Ibid., p. 96).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substance)와 성질들(natures)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 306).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Ibid., pp. 306, 307).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Ibid., p. 162).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 p. 17).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bid., p. 15).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 . .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Revelation as History, pp. 13, 14).
 
사람이 성경을 판단하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94).
 
사도신경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10).
"사도신경의 표현 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 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 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 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 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 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Ibid., p. 13).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兆)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진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성(nature)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The Apostles' Creed, pp. 63, 64).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Ibid., p. 104).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의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Ibid., p. 91).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Ibid.,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Ibid., p. 310).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pp.53, 5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 . . 칭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Ibid., p. 59).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Ibid.).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Ibid., p. 65)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294).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Hymn of the Universe, p. 133).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Ibid., pp. 143, 144).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39).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Ibid., pp. 79, 80).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Ibid., p. 221).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Ibid.).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The Future of Man, p. 66).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312).
 
에큐메니칼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 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 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Science and Christ, p. 190).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Ibid., p. 197).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Ibid., p. 198).


마태복음은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 3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Ibid., p. 35).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 12).
". .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Ibid., p. 26).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 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 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 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p. 3).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Ibid., p. 4).
 
기독교의 절대적, 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두드러지게 다르다"("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p. 7).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리운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Ibid.).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Ibid.).

미국의 머서 대학교 신약과 설교 교수 폴 듀크는 "동성애와 교회"라는 제목의 1994년 협동 침례교 협의회(남침례교단의 자유파)의 총회전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 . . 동성애는 성경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 . . 나는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듀크는 동성애적 짝들의 결합에 대한 자신의 '넓은 후원'을 긍정하였으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은 이성애적 짝들이라고 주를 붙였다. 머서 대학교는 미국의 보수침례교협의회(Conservative Baptist Fellowship)의 재정지원을 받는 학교이다. (Calvary Contender, 1 June 1999.) 오늘날 보수적이라는 명칭을 가진 교단들이 다 참된 보수적 교회가 아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머서 대학교 총장 커비 갓세이(Kirby Godsey)는 한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라고 주장하고, 동정녀 탄생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버리고, 회개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근거'임을 거부하고, "교리적 건전함이란 교만한 신학적 난센스[터무니 없는 생각, 허튼말]이다"고 주장한다(Baptist Banner, Jan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February 2000).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1983년 8월 5일자는 당시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목사이었고 후에 온건-자유파 협동 침례교단의 초대 전국 의장이었고 현재 자유주의적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시실 셔만박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성경에 의해서 또한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도록 인도함을 받을지도 모를 선생은 해고되어서는 안된다. . . . 그것[동정녀 탄생]은 두 복음서들에 있으나 다른 두 책들에는 있지 않다. . . . 마가와 요한은 그것을 나열하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실수를 범했는가? 만일 동정녀 탄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마가와 요한은] 잘못을 범한 것일 것이다." (Baptist Banner, 1 March 2001; Calvary Contender, 15 April 2001.)

 

 로버트 슐러
로버트 슐러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 에이지) 연례 대회를 위해,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인 조찬 기도회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그리고 천주교인들은 그의 수정 대성전 강단에서 연설했었다. 그의 가르침들과 행동들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이단적이다. (Vantage Point, November 1998;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로버트 슐러는 뉴에이지 사람들, 몰몬교인들, 및 천주교인들과 강단 교제를 나누었다. 그의 교훈들과 행위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이단적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잃어버리고 죄악된 상태를 깨닫게 하려는 비기독교적이고 투박한 전략보다, 더 인간 개성에 대해 파괴적이고 따라서 전도 사업에 반생산적이라고 증명된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깃발 아래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4 January 1999; Calvary Contender, 1 January 1999; 1 February 1999).

미국의 크리스탈 교회 목사 로버트 슐러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우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The Discerner, June 1999; Christian News, 19 July 1999; 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9).



기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는, 진리가 단순히 문화나 개인의 '구성물'이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내게 참된 것이 너에게는 참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적 경험주의, 과학 및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들이나 다른 모든 객관적 진리에 대한 점진적 거부를 대표한다. 상대주의와 개인의 경험이나 느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개인적 진리의 기초이다. 설문 조사 통계들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86퍼센트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72퍼센트는 절대적 진리의 개념을 부정하고, 61퍼센트는 문자적 사탄이나 지옥을 부정하고 40퍼센트는 하나님에 대한 뉴 에이지 견해를 믿는다. (World, September 1998; Calvary Contender , 1 October 1998.), 12 September 1998; Watchman Expositor

미국 복음주의 협회(NAE)의 세계 구제기구(World Relief) 회장 클리브 캘버는 말하기를, "내가 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 것은 한 전도자가 설교한 메시지 때문이 아니고 그가 그의 삶을 산 방식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이스턴 신학교의) 란 사이더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배고픈 자들을 먹이지 않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미국 침례교회의 신문 크리스챤 시티즌(5쪽)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본다: "전도는 우리 마음에 생각되는 모든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변혁시키시고 해방시키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 왕국의 임함을 알리는 것이다." 성경적 복음(고전 15:1-4; 롬 1:16)을 포함하지 않는 그 어떠한 전도도 성경적 전도가 아니고 무력(無力)한 '사회 복음'이다. (Charisma, December 1998; Calvary Contender, 15 December 1998.)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의 대의원들인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는 단성(單性) 언어 번역들 성경을 만들어 내려는 국제 성서 공회(IBS)와 새 국제역(NIV) 성경 번역 위원회와 및 존더반 출판사의 최근의 노력들을 반대하고 비평함에 있어서 연합한다. 우리는, 영감된 성경 본문에 있는 성이 구별된 명사들과 대명사들을 현대 번역들에서 중성 단어들로 고의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에 대한 성경 자체의 교훈에 모순되며 결국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의 거룩한 본문에 대한 더러운 위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9.)

1636년 목사들을 위한 양성 학교로 설립된 미국 하버드 대학교는 130억달러의 기금과 16억달러의 연간 수입을 가진 미국 고등 교육의 우상이 되었다. 학교에 출석하는 18,000명의 학생들 가운데, 학부 학생들은 매년 수험료와 기타 경비로 무거운 32,000달러의 금액을 낸다. 낙태 찬성, 반(反)군국주의, 인종 편애, 과격한 남녀평등주의, 종교적 상대주의 등의 자유주의적 입장들은 캠퍼스에서 복음으로 간주된다. 천주교회 신부가 부장인 하버드 신학부는 자유주의와 개방적 마음가짐, 다양성(그러나 위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없다!), 및 정치적 정확성 등을 자랑한다.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하버드 대학교에 퍼져있다고 한다. (World, 9 October 1999; Calvary Contender , 15 November 1999.)

프리칭지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을 열거하면서 빌리 그레이엄과 마틴 루터 킹을 처음 10명 중에 두었다. 그 목록은 또한 스코틀랜드 설교자 제임스 스튜어트, 죠지 버트릭, 해리 에머슨 포스딕, 지 캠벨 모건, 윌리엄 생스터, 죤 알 더블류 스토트, 마틴 로이드-죤즈, 및 클레어런스 매카트니를 포함한다. 두번째 10명은 레슬리 위더헤드, 죠지 트루에트, 알 쥐 리, 노만 빈센트 피일, 피터 마솰, 이 스탠리 죤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랠프 사크맨, 더블류 에이 크리스웰, 및 가드너 테일러이었다(Christian News, 20 December 1999; Calvary Contender, 15 January 2000). 그러나 마틴 루터 킹, 해리 에머슨 포스딕, 노만 빈센트 피일 등은 정통 기독교와 거리가 먼 사상을 가진 자들이다.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미국 교회협의회에 대한 그 교단의 270만불의 후원금과 세계 교회협의회에 대한 120만불의 후원금을 삭감하자는 두 개의 헌의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켰다. 그것은 그 교회가 교회협의회를 위해 충분히 재정 지원을 계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미국 장로교회는 미국 교회협의회의 두번째로, 즉 연합감리교회 다음으로 큰 후원교단이며, 그 돈의 대부분은 세계 봉사국이라는 그 협의회의 기관을 위해 사용된다. 그 교회는 또한 그 협의회의 부채를 위해 50만불을 지원했었다. (Christian News, 17 July 2000,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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