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영국의 선구적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

영국의 선구적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4-1384)는 1324년 경 영국의 요크셔(Yorkshire)에서 태어나
옥스포드에서 공부하고 1372년에 신학박사가 되었다.
존 위클리프는 영국 요크셔 출신으로 옥스포드를 다녔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신학
교사로 거의 한 평생을 옥스포드와 인연을 맺고 살았다.
그는 학자였으며, 사제이며, 중세 스콜라 철학의 석학이었으며, 국가주의자였던 애국자 존
위클리프는 모든 면에서 14세기의 뛰어난 복음주의자였다.
교회의 부와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법에 대한 격렬한 공격, 성사예배 제도에 대한 그의 비판, 라틴어 성서의
영문번역 등은 후세에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기의 샛별이하고 받들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라터워스의 사제관에서 1384년 조용하게 서거할 때까지 교황으로부터 초지일관 자신의 신앙을 지켜낸 인물이다.
그리고 20년간에 걸쳐 위클리프를 열심히 따르던 설교자들은 성서를 민중들에게 주어서 교회 내부에 만연되었던
폐해, 죄악을 훈계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유명론]으로 유명한 윌리엄 옥캄(William of Ockham)의 영향을 받았다.
1374년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를 루터워스(Lutterworth)의 교구 목사로 선임했고 왕과 교황을
중재하기 위하여 교황의 대리인을 만나기 위해 왕의 대리인의 한사람으로 브뤼셀에 파송하였다.
이 무렵 위클리프는 "은혜에 기초한 주권"(dominion founded on grace)에 대하여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주권(dominion)은 교회 혹은 국가 내의 권위를 실행하는 권리 또는 자산에 대한 권리를 모두 의미한다.
그는 이 같은 권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직접 부여된 것이며, 교회나 국가는 거룩하게 하는 은총으로부터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도덕적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교회나 국가의 공식적 직임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회가 죄악에 빠졌기에 모든 유형 무형의 자산을 포기해야만 하며, 성직자는 완전히 청빈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왕에 의해 실행되었다.
위클리프는 1376년부터 1378년까지 그의 조카 리쳐드 2세 때까지(1381) 영국을 통치했던 가운트의 존
(John of Gaunt)을 성직자로서 보좌했다.
그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추측컨대 성직자의 부와 명예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운트가 위클리프를 배려했다고 여겨진다.
1377년 왕과 의회는 위클리프에게 전통적으로 로마에 상납하던 일을 보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요청했고
위클리프는 그에 대하여 응답하였다.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다섯가지의 사항에 대하여 지불을 요구했으나 그 요구는 수락되지 않았다.
위클리프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교회 안에서 신성하게 보호되던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그 신성의 장막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을 끌어내는 논쟁을 하였던 1378년에 있었다.
그 후 1381년 위클리프는 그의 개인적인 삶을 위하여 루터워스(Lutterworth in Leicestershire)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 후도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부패를 엄하게 공격하는 시리즈를 출판하였다.
이런 통렬한 비난은 예전에는 유례가 없던 것이었다.
1381년 재앙은 농민반란(the Peasants' Revolt)과 함께 부닥쳐 왔다.
식자층에게 퍼져있던 위클리프의 가르침과는 달리 위클리프의 사상은 반란을 부추기는 역할에 이용되었다.
사실상 많은 농민들은 지주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리하여 위클리프의 "은혜에 기초한 주권"(dominion founded on grace) 사상은 극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위클리프의 운동은 농민반란과 함께 유혈 진압되었다.
1382년 그의 모든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그 해에 위클리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384년 12월 31일 두 번째로 발병한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1403년 독일인 교수인 요한 휘브너는 위클리프의 작품을 발췌해 45개 항목을 만들어 이단적인
것으로 정죄했다.
독일 교수들에게는 3장의 투표권이 주어졌고 보헤미아 교수들에게는 1표가 주어졌다.
독일인들은 손쉽게 보헤미아인들을 누르고 45개 항목을 정통에 도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또한 그의 적대자들은 1415년에 있은 콘스탄스 공의회에 위클리프의 사상을 제출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레고리 11세와 우르반 6세는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위클리프를 정죄한 바 있다.
1428년에는 그의 시신이 축성된 장소로부터 이장되었다.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롤라드파"(Lollards)라고 불려졌다.
그 이름은 화란어 'lollaerd'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얼거리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소그룹은 1382년에 옥스포드에서 축출되었다.
그렇지만 1394년에 몇몇의 헌신된 회원들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계속 펼쳐 나갔다.
위클리프는 주로 성서 번역에 있어서 기억되고 인정받고 있다.
1380년대 초기에 그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이끌었는데, 관용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된 두 개의 완전
번역본을 내었다.
그것은 설교자들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설교하게 되는 새로운 종교적 상황을 가져왔다.
오늘날 위클리프의 성서번역은 위클리프 성서번역 협회가 뒤를 이어받아 세계의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한 노력으로 계승되고 있다.
후스파 운동 초기에 후스파와 그들의 주장은 위클리프파(Wycliffites) 혹은 위클리프주의(Wycliffism)로 간주되었고,
이 말 대신에 후스파(Hussites)와 후스주의(Hussitism)란 말이 사용된 것은 후스가 죽은 지 훨씬 이후였다.
위클리프는 후스의 개혁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후스 자신도 생전에 위클리프주의자라고 불리웠으며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진 직접 원인도 위클리프의
사상을 지지하고 그것을 배격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후스에게 직접 영향을 준 위클리프의 사상은 교회론과 성만찬론이었다.
그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의 무리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자들을 가리켜 '미리 알려진 자들'(presciti)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들을 교회에서
영원히 제외된 자들로 간주하였다.
또한 구원받은 자이건 저주받은 자이건 그들은 이미 예정되었으며, 교회는 오직 "예정된 선민들의 공동체"
(congregatio predestinatorum)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는 '누가 선택받은 자이고 누가 저주받은 자인지는 특별한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에 의하면 유형교회의 구성원이라 해서 그가 하나님의 참된 교회(무형교회)의 일원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았다는 증거는 그의 품성의 거룩함에서 드러나며 이 기준으로 보면 당시 성직자들은 결코
그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또한 수도원의 폐지를 주장하고 교황이 비(非)영적인 일 즉 세속 정치권력을 조종하는 것을 비난했으며,
성자, 마리아 그리고 성상숭배를 비판하였다.
교황은 물론 그에 동조하는 교회의 가시적 권위는 그들 자신이 타락하여 부름 받은 자로서 합당한 품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부정되었다.
결국 교회의 가시적 권위를 부정하는 그의 사상은 당시 교회와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위클리프의 이런 견해는 성사의 효력이 성사 그 자체에 있다는 카톨릭의 전통적 견해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성사의 효력이 성사를 행하는 자의 도덕적 품성에 관계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한 이런 위클리프의 견해는 후에 후스와
루터에게로 이어졌다.  
성만찬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위클리프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카톨릭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을 부인했지만 성만찬의 성례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유용한 표징'(an effectual sign)이라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빵은 그 자체로 남아있고 그리스도는 빵 안에 실제로 현존한다.
그렇지만 이 현존은 질료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빵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고 그 질료 자체는 빵으로서 남아있다는 잔류론
(consubstantiatio)을 주장한 것으로,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후일 루터가 갖게 될 견해 즉, 공재설(consubstantiation)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는 그 자신이 충직한 교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견해와 의문들에 대한 판단을
교황의 판단에 맡겼다.
그러나 그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1381년 옥스포드 박사회의(Oxford council of doctors)에서 정죄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교회의 권위나 전통보다 우월한 권위였다.
성서는 대중이 알기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어야하기에 성서번역은 불가결한 것이었다.
또한 성서의 지식은 설교를 통하여 유효하게 선포되며 더 귀중한 의식은 없다고 생각했다.
1382년 블랙훼어스(Blackfriars)에서 있었던 소위 '지진 공의회'(Earthquake Council)에서 그의 성만찬 견해는 다시
한번 정죄되었고 1383년에는 켄터베리 대주교가 옥스포드에 있는 롤라드파를 격퇴하였다.
1384년 위클리프가 질병으로 죽은 후, 1401년과 1406년 헨리 4세에 의해 다시한번 롤라드파에 대한 강력한 박해가
있었고 1년 후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위클리프의 신조들과 성서 번역이 정죄되었다.
1409년 런던 공의회에서 몇 명의 롤라드파가 화형을 당하였다.
헨리 5세에 의한 탄압이 이어졌고 런던에 있는 "Little Lincoln's Field"에 잔존한 롤라드파가 모였을 때 국왕의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체포되어 37명이 교수되고 7명이 화형을 당하였다.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260가지의 위클리프의 사상을 정죄하고, 그의 글들을 불태우고 시신을 파헤쳐 불사른 후
강물에 뿌릴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1428년에 와서 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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