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7일 월요일

교권주의 비판-4 (교회개혁에 대한 글)

교권주의 비판-4 (교회개혁에 대한 글)
 

(1) 성전을 헐고 교회당(또는 예배당)을 짓자.
1. 서언
 1) 기독교개혁운동은 참 복음으로 돌아가는 역사적 신앙혁명운동이다.  
 우리가 기본지표로서 민족적 회개를 부르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한국기독교를 병리학적으로 진단해볼 때, 처방은 오직 참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와 잘못된 신앙의 본질회복을 부르짖고 있으며, 이와같은 본질회복운동 없이는 윤리운동이나 제도개선만으로는 근본적 치유는 이룩될 수 없다고 본다.
 3) 이 운동은 성경의 보편적 진리안에서 인간이 탈취한 주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꼭 필요한 신앙운동이다.
 4) 본회는 앞으로 4회에 걸쳐 한국기독교개혁을 위한 시급한 과제들중 아래 4가지 주제하 에 따라 매회 공개강연회를 갖기로 하였으므로, 많은 참여를 바람.  
(1) 성전을 헐고 예배당(또는 교회당)을 짓자.
(2) 십일조사상의 재검토
(3) 목회자의 권위주의와 우상화 추방
(4) 왜곡된 복음주의

2. 교회의 변질--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인격체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들은 언제부터인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대형성전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건축되고 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과도 같이.  
 이와같은 현상은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들의 복음에 대한 무지로 인한것이거나 아니면 교회의 기업식 경영을 위한 방편으로 한 비성서적 작태라 할 것이다. 교회가 물질화·대형화되고 성전화된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직시해보라. 교회는 물량주의 외형주의로서 풍요가운데의 정신적 배고픔(POVERTY IN PLENTY)의 경제학 이론이 적용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예배당이 성전으로 변함으로써 강단은 제단이 될 수 밖에 없다. 또 목사는 제사장의 권위로 나서게 되고 성도들은 자기 성전(예루살렘성전 같이)에서만 제사드려야 한다는 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하나님을 성전안에 가두어 두는 신앙, 교회안에서만의 신앙인을 길러내고 교회로서의 참 사명을 둔화시킨 주된 원인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에 있다고 보고 개혁대상의 제1주제로 삼은 것이다.

3.  오늘의 주제와 성경상고  
 한국기독교 2백년 역사를 생각하여 볼 때, 그동안 한국교회가 많은 성장과 부흥을 한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 모습은 신앙이 기형적으로 성장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진리 안에서 한국교회를 조명하여 볼 때, 물질적으로, 또한 양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하였으나, 영적인 면으로는 점점 타락해 가며, 병든 모습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자인할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문명의 발전과 생활 수준의 성장이 가져다 준 부와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지향적 삶의 모습을 바라보며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크리스챤들이 소중한 사명을 상실한 채 세속주의의 모습으로 교회마저 부패하여 허영과 부를 앞세우고 물량주의의 신앙으로 타락하여 교회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세워 그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의 모습을 마치 교회의 건물로 나타내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기까지 할 만큼 겉치장에 열렬하여 경쟁을 하고 있지만 속 신앙의 모습은 병들어서 순수한 성도들 까지도 영혼이 구원받는 것 보다는 신앙 생활을 잘하면 물질 축복이나 많이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하여 질 수 있으며 이 것이 신앙 생활을 잘하여 복받는 성도의 모습으로 착각에 빠져 허영과 쾌락으로 병들어있다.
 게다가 일부 몰지각한 교역자들이 이를 이용 헌금을 많이 낼 수록 그에 비례하여 더 많은 축복을 받을것이라며 은근히 헌금을 강요함은 물론 빗나간 헌금 교리를 가르치고 있어 무조건 순종으로만 길들여져 왔던 신도들중 일부는 집안의 기둥뿌리까지도 뽑아다 바치는 사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교회안에서도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지고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교회의 규모가 평가되며 따라서 신도들의 직분과 인격까지도 물질에 따라 평가되는 참신앙 부재현상이 일고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배경속에서 사이비와 이단들이 속출할 수 밖에 없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교회는 타락의 늪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인류와 만물을 창조하신 뜻은, 온 인류가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살아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 없게 되자,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해 다시 오셨다. 그러므로, 다시 오신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선민도 이방인도 없다. 누구든지 이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딸로서의 신분을 회복케 된다(새로 얻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학문을 손꼽는다면 철학이 가장 높은 학문이라고 말들을 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육의 것을 다루지 않고 정신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은 철학이상의 것을 다룬다. 물질보다도 정신, 정신보다도 신앙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신학을 한 목사님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앙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신앙을 앞세워 살아야 한다. 신학이나, 신앙생활은 세상의 철학보다 월등히 차원이 높고, 또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영혼을 구원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더구나 신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목사나 장로가 육신의 것, 물질의 것을 더 추구한다면 잘못된 신앙이 아니겠는가.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성부)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씀이다. 우리 안에다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시고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는 말씀이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성자)께서도 우리 믿는 성도들안에 계시다는 말씀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 안에서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하시나니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고 고전 3:16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 한국 기독교는 언제부터인가 예배당을 성전 이라고 호칭을 하게 되었고, 신앙이 병들어 건물을 중요시 하며,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지으려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도 과거에는 교회건물을 예배당이라고 바르게 호칭하였었다. 교회학교 유년 주일학교에서 "예배당 가자" 라는 찬송소리를 들은 것이 새삼 그리워진다.  
 히9:24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시지 아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 이름을 믿고 그를 영접하는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고, 예배당(건물)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진리를 전파하는데 필요로 하는 집이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데 필요한 집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예배당을 짓기 위하여 헌금을 강요함은 물론이고, 타 교회의 건물과 비교하고 경쟁을 하듯이 더 큰 교회당, 더 웅장한 교회건물을 주장하여 물량주의와, 외형주의로서 유도되어 성도들의 신앙은 물질주의 신앙, 즉 기복주의 신앙으로 병든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은, 건물을 섬기고 건물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예배당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잘 관리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보존해야 할 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건물을 우상화한다거나 건물을 신격화하여 거룩하게 표현하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같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 4:21-24에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 예수님께서는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끝으로 우리는 세속화 되어져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량주의로 인하여 예배당을 크게 짓고 외형적인 치장에 몰두한 병든 신앙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성도(성전)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섬기고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바쳐진 헌금과 물질은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구령사업(선교사업)과 이웃을 돕는 구제사업과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데 아름답게 쓰여지는 헌금이 되어져야 할 것이며 교회건물을 크고 지나치게 웅장하게 건축하는데 사용되는 헌금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3. 결어  
 기독교신앙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성경대로 믿지않으면 구원과 영생은 없으며 모두 헛것이 되기 때문에 본 주제는 본회의 첫 번째 개혁과제가 된 것이다.  



 (2) 십일조 사상의 재검토
1. 기독교신앙의 변질--기복신앙은 참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기독교가 극도로 기복주의신앙으로 치닫게 된 근본원인은 10.1조 사상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교회마다 목사들 마다 그리고 장로들 까지도, 구약 말라기서를 근거삼아 10.1조를 갈조하여 신앙생활의 기본지표로 삼아왔고, 기독교를 신 율법주의 사상으로 이끌어왔다. 그러나, 기독교리에는 10.1조 사상은 없다. 10.1조는 구원과 전혀 무관하다. 10.1조를 내지않은다고 해서 도적질한다거나(형벌) 10.1조를 낸다고 해서 곡간이 차고 넘친다고 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 10.1조로 인해 교회가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하여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병이 들었다고 봐야 한다. 이 사상이 시정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신앙이 정립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십일조 사상의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한다.  
 * 구약시대(신정시대)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소출의 주관자이신 하니님께 대한 당연한 의무였다(레27:30-33). 즉 의무에서 비롯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에 대한 감사와 약속의 이행으로 의무에서 십일조를 약속함(창 28:20-22). 
 * 지파중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받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무화 시켜 명령한 것이다(민 18:21-24).  
 * 하나님의 것을 어찌 도적질 할 수 있겠느냐, 창고가 넘치지 아니하나 시험해 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복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두려움에서 드리는 신앙이었다(말 3:8,10). 위와 같은 십일조 사상은, 신정국가 시대의 제도와 법률로 규제된 것이다. 그런데, 신약시대 은혜시대 복음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구약에서의 율법을 그대로 적용함은 교리상 허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여 잘못된 신앙은 고쳐야 한다고 본다. 

2. 신약시대의 교회는 구약시대의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문과 기타 외부적 의식의 제재에서 초월하여 십분의 일이란 숫자의 법령적 제재는 받지 않는 것이다. (고후 3:12-14)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사마다 자기교회가 감심(감사함)으로 헌금하도록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불문하고 자기 힘있는 대로 바치게 할찌니다" (예배모범18장 4절).  
  즉 예수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말라 하신 말씀을 하실 당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이전이었으므로, 즉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시키시기 이전이었으므로 율법을 좇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문둥병환자를 고치시고 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자.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당시는 율법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십자가 이전 상황이었으므로 예수님도 할례를 받으시는등 가급 충돌을 피하고 유대법을 따랐던 것이다. (히9:10 :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 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따라서, 위 구절을 오해한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신약전체에 걸쳐 예수를 오해한 중대한 결과에 도달할 위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은혜시대 복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율법의 의무적 십일조 신앙과 복받기 위하여 하는 기복적 십일조 신앙에서 하루속히 벗어나 이제는 성숙한 크리스챤의 모습으로 돌아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십일조의 의무적 두려움의 신앙에서 탈피하여, 은혜에 감사하는 기쁜 헌금 자유스러운 헌금을 바치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탈바꿈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구약시대의 법령(율법)으로나 약속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한 처음(太初)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친히 보내시게 된 것이며,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인자(人子)로서, 구법(舊法)이 아닌 신약(新約)을 선포하셨다. 즉,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는 영광을 받아 부활승천하심으로 비로서 하나님이라 불리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할례받으신 예수를 본받거나,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 유대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을 두고 우리도 유대법을 따르라는 식으로 해석하거나, 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러할 때 하신 말씀도 율법을 따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고 하면 크게 잘못된 해석임이 분명한 것과 같이, "그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유대법이나 율법을 그대로 따르라고 하셨다는 식의 해석은 크게 잘못된 해석임이 분명하다.

3. 연보는 어디서 어떻게 드려야 하나 ?  
 구약시대의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도록 되어있었으니 헌금도 외부적 제도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어디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으므로(요한 4:19-21) 신자의 영적 자유를 존중한다.  
*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 요 8:31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 유케 하리라"
* 벧전2:9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 행 10:1-4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자기가 가난한자를 도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았다.
*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 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마 25:35-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 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신자개개인은 그 자체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인 만큼(고전3;16-17), 신자가 믿으으로 어떤 개인(가난한자들)을 구제하거나 기타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하는 행위(사회봉사 민족봉사등)는 모두 헌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행11:30, 롬15:26, 고후 9:1-14) 

4.. 예수님과 율법
 4-1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 에베소서 2장 1--5절(죽었던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음), 14-15절(원수된 것 곧 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육체로 폐함)
* 십일조 사상은 신앙적으로 율법주의와 결부되기 때문에 구원론적 차원에서 중요시 된다.
* 갈라디아 3장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4-2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 마 5:17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니로라 "
* 마 5:18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 하고 다 이루리라 "
* 눅 16:16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
* 롬 7:6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찌니라 "

 4-3 복음과 율법 
*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 히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
*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 갈 3:13 " -- 율법의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4:5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1-6
*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
*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
* 고후 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담히 말하노니"
* 고후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리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5. 맺는 말
  한국교회가 십일조로 말미암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교회의 양적성장과 물질봉사 및 구제사업등에 많은 공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본인 역시도 이와같은 긍정적면을 십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폐지하자고 웨치는 이유는, 첫째로 십일조사상이 비기독교적이라는 점이고, 둘째로는, 십일조사상이 기독교를 지나친 기복신앙으로 만들었으며, 셋째, 현상적으로도 교회들이 물질을 얻은 대신 정신이 병들어 양(量)을 얻은 대신 질(質)을 현저히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존재의 의미는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고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일조로 아무리 큰 집을 지을 수 있고 또 기도처나 묘지를 살 수 있고 많은 물질로 구제한다고 하더라도,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보다 더 귀할 수는 없으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실을 하지못하고 변질되어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를 개혁의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더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도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박하규 목사 저 "한국교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 펴낸 곳:도서출판 대장간(031-23-8440) 1930생 서울대학교 물리대 정치학과. 한신대. 고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문학석사.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신학석사 신학박사.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목사안수받으신후 17년간 목회 하시다가 1990 건강상 조기은퇴하심.  
 저자는, 「특별한 행위나 공로가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같이, 특별히 십일조나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필요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왜곡하는 자 화 있을진져 !」라고 책 표지에 기록하고 있다.  


 
(3) 교역자의 권위주의와 우상추방
1. 서언
 교회의 영욕(榮辱)은 목사님들에게 그 공과(功過)가 돌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평신도들의 역할과 영향이 크기는 하지마는, 목사에 비해 그 비중은 극히 미미함이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된다" 라고 할 때에도 그 책임이 주로 목사님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비대하여지며 물량주의로 흐르면서 세속화되고 목회자들이 권위를 내세우고 있어 교회의 문턱은 말할 수 없이 높아져만 가고 있다는 비난의 소리가 쟁쟁 하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2. 목사의 성서적 지위에 대하여
 목사와 평신도는 기능과 역할에 차이가 있을뿐, 성서상으로는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라는 기본적 사실을 확이할 필요가 있다(라오스, 레이티, 레이맨--목사도 성경 상 평신도이다).
엡 4장11-12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의 성경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목사도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주신 하나의 직분에 불과한 것이 분명하다.
벧전 2장 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롬 9:25-26 고후 6:16, 히 4:9 등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같은 백성이요 제사장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외에 행 15장 14절, 롬 9장 25--26절, 고후6장16절, 히 4장 9절을 보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같은 백성이요 제사장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이다 .
 그런데, 목사상의 현주소는 그것이 아니다. 목사는 성서상으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의 특권과 사도권 축복권이 있다고 하고, 선악간에 그 뜻을 거스릴 경우에는 화가 미친 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목사의 말을 듣지안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든가 배가 아프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이것은 성서에 반한 잘못된 가르침임이 분명하다. 그가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린다는 식으로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며, 이와같은 사실은 한국교회가 타락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마16:19에 있는 말씀을 오해하여 천국열쇠가 마치 현재의 목사에게 있다고 오해한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교회분열, 교회난립, 개교회주의, 비성서적, 세속적 권위, 기복신앙, 구제 부족, 사랑실천 부족, 사회봉사 부족, 예배의 형식화, 귀족화, 교인간의 위화감, 비민주적·비민족적·전근대적운영, 교회는 목사 위해 존재(심지어 목사 소유로), 평신도는 오직 복종적 존재(축복과 은혜 받는 관계). 장사주의(돈봉투), 혼인주례도 돈, 여기저기 특별집회도 엄청난 돈, 그리고 이 수입들은 거의가 모두 목사 개인의 수입이 되고 있는 실정. 교회에서는 정해진 급여 등등을 고스란히 다 받고 이것들은 모두 개인의 부수입이 된다(단, 부흥회 사례금을 언제나 교회에 헌납한 목사님이 계심을 안다).
 또, 국민으로서 당연히 수입중 일부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함이 도리인데도 목사의 수입은 단 한푼도 세금으로 내지않은 치외법권에 속한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 그리고도, 공무원의 부수입을 꼬집고 탈세자를 비난하고 과외수입자를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공직자에게 충실의 의무가 있는 것 처럼 목사에게는 봉직하고 있는 교회에 보다 고도의 충실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출입국관리국에 사실을 조회해 본다면, 목사들의 해외여행이 얼마나 빈번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앞으로 조사해 공개할 방침임).
 목사사회에서의 이러한 풍토는 결국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와같은 현상은 선교의 문을 막으며 국민들로 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신실한 종, 농촌 목회자 등은 인정받지 못하고 정치꾼 목장로들이 난무하게 되며, 참사랑 어디로 가고 이름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계 3:1)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양산된다.

3. 시정방법 제시
 1) 축도는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사도시대가 아니다. 모든 기도는(축도도 기도이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않으면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기 때문 이다. (요 14장 6,13절 및 전시 벧전 2장 9절, 엡4장 11절등등..). )  
 2) 부흥회 수입, 주례수입 등은 필요한 경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에 바쳐야 한다. 부흥회기간동안 봉직한 교회에는 그만큼 일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야 목사들이 부흥회등 외부에 나가는 것을 많이 자제하게 될 것이다.  
 3) 이러한 점에 대해서 목사님들을 위해 온 교우들의 기도가 절실하다. 목사님 한분의 회개는 장로님 10분의 회개이상의 효과가 있고 평교인 1000명 이상이 회개함 보다 한국 기독교 개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결어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찾이하고 있는 정신적 사회적 비중과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본다. 그런데, 산업적으로는 아직도 개발도상국가의 권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도 교회만은 부를 누리고 있으며, 많은 교인들은 정신적으로 전근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소비생활이나 사회생활은 선진국민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목사들이 실생활을 통하여 교인들로 부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한다면 교회의 존재가치는 평가받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립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님들이 권위주의와 교인수 늘리기에만 주력하지 말고 하루속히 성서의 사람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본받아 교인으로부터나 국민으로 부터 실추된 존경심을 회복받는 일이 긴요하다고 본다.  
 (본회는 개혁단체로서 훌륭하고 존경스럽고 모범적인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마는, 일반적인 사실을 전제로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이점 깊이 이해있으시기 바란다)  



(4) 왜곡된 복음주의
1.서언  
 1) 기독교개혁은 신앙혁명운동이요 민족구원의 시대적 명제이다 .  
  우리가 기본지표로서 민족적 회개를 부르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막 1: 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2) 한국기독교의병리학적 진단을 통해 처방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타락한 교회와 잘못된 신앙의 본질회복을 부르짖고 있으며, 본질회복운동 없이는 윤리운동이나 제도개선만으로는 근본적 치유는 이룩될 수 없다.  
 3) 이 운동은 성경의 보편적 진리안에서 인간이 탈취한 주의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꼭 필요한 신앙운동이다.  
 4) 한국기독교개혁을 위한 시급한 과제들로써 그동안,
 첫째문제 : 교회의 변질--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인격체이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히 9장) 그런데, 한국교회들은 언제부터인가 교회(또는 여배당)를 성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대형성전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건축되고 있다. 솔로몬의 성전건축과도 같이. 이것은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들의 무지로 인한것이다. 이 성전사상은 교회를 물질화 형식화하고 하나님을 성전안에 가두어두는 교회안에서만의 신앙인을 길러내고 교회로서의 사명을 둔화시켰으며, 물량주의 외형주의로서 풍요 가운데의 빈곤(POVERTY IN PLENTY)의 경제학 이론이 적용되는 형실이 되었다. (별지 인용 성경귀절 참조)  
 두번째문제 : 기독교신앙의 변질--개인주의 기복주의 신앙은 참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근본원인은 10.1조 사상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교회마다 목사들마다 그리고 장로들까지도, 말라기서를 인용하며 10.1조를 신앙의 판단기준으로 삼아 신 율법주의 사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10.1조는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며, 곡간이 차고 넘치기만을 기대하는 신앙은 불건전한 신앙이다. 이 사상이 시정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신앙이 정립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모든 것이 주께로 왔으니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본연의 기독교로 회복되야--.
 세번째문제 : 목회자의 권위주의, 우상화, 절대화는 교회타락의 원인이되므로 상징적으로 축도의 형식부터 시정해야.-- 축도는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네번째문제 : 신앙 생활화 문제.  
  신앙은 행함으로 빛도 되고 소금도 된다. 이것이 절실하다.--

2. 오늘의 주제 : 왜곡된 복음주의.  
 가)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믿는 종교인데, 이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로되 신약시대에만 나온 말이다. 이 복음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옮으로 감취었던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나타나신 것 (골 1:26) 이다. 곧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이 복음이며 (good news),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 성경을 복음서라고 한다. -- 이 얼마나 상식적인 이야기 인가 ? 그러나, 이 복음을 왜곡시켜 율법화한 사람,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한 사람, 샤마니즘 적으로 풀어가는 사람, 자기 합리화나 편리할대로 풀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신학 난립, 기도원 난립등으로 인하여 10인 10색처럼 천태만상인 타락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부외의 사람인양 착각하고 자기의 신앙 자기의 주장만이 참 복음주의 신앙이라 주장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나) 과연 참다운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 어떻게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인가?
  당신은 참으로 구원을 얻은 것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에 대한 대답으로 왜곡된 복음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대로 믿지않고 소경을 따라가는 불쌍한 군상들의 대열에 끼어있다 고 하면 불쌍한 존재들일 수 밖에 없으니 어서 빨리 뛰쳐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개혁운동에 나선 우리들은 이 사명 다하여 불쌍한 동포들을 구해내야 한다.  
 다) 왜곡된 복음주의 진단법  
*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하지않은 신앙
* 구약도 신약과 대등하게 모두 복음서로 보는 신앙
* 교회를 성전이라 하고, 말라기서에 따라 십일조를 강조하는 신앙
*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보다 개인의 영광, 축복에 치우치는 신앙 교회도 지교회 사상을 가지지 않고 단위 교회의 양적부흥에 치중하는 교회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한 말씀대로 가르치고 생활화하지 않은 신앙
* 삶속에서 예수를 증거하도록 하는 기회 보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을 곡해하여 실생활을 거의 무시하고 밤낮없이 교회안에 모이게만 하는 신앙.


 
참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요 8:31-32)

인사 말씀  
1966. 3. 1. 부족한 제가 장로의 직첩을 받은지 꼭 30년, 이제 교단법에 따라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을 돌이켜 보면서, 먼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 지금은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으나 저를 교회로 인도해 주신 사랑하는 친구,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진리를 가르쳐 주신 고마우신 목사님들, 그리고 저를 참 사랑으로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리는 바 입니다.  
특히, 주님의 참 교회되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애써오다가 교권주의 앞에서 핍박받고 고통을 당한 형제 자매님들과 하나되는 운동에 참여해 온 동지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하나님의 위로와 크신 축복을 빌면서 계속 힘써 주시기를 아울러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제, 저는 교단법에 따라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로로서 못다한 일과 부족한 점등을 돌이켜 보면서 못내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특히 최근 6년간 중앙감리교회에 돌아와 마지막 봉사를 하려고 무척 노력도 해 보았으나, 제 힘이 너무도 부족해서 이루지 못한채로 이제 은퇴하게 되니 허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결코 은퇴는 없습니다. 이제 부터 새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주신 은혜와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참 복음을 지키며 전파하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 작은 책자는, 제가 장로은퇴를 기념하여 저의 믿음과 사상을 간추려서 적은 것입니다. 계속적인 기도와 협조를 부탁드리오며, 아울러 참 복음을 지키며 전파하는데 도움이 될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 빌립보서 3 : 12 ) ----  

차 례  
인사 말씀  
1. 참 복음을 얻기 위하여는 먼저 회개가 필요하다. * 요절 ---막 1: 15----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  
2.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의 식별법 * 요절 --- 롬 8 : 1--4, 15 ---  
 생명의 성령의 법(복음)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 종의 영(거짓 복음)과 양자의 영(참 복음)을 어떻게 식별할꼬 ?  
3. 회개할 시급한 표목들  
4. 승리의 길 (맺는 말)
기독교가 새로워지기 위하여는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 이다.  
5. 한국 기독교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이름은 기독교 교회이지만 실은 죽음의 영, 무서운 영, 의문에 속한 율법과 기복신앙만을 전하고 있는 사이비 기독교 교회이며, 거기서 생활하는 많은 불쌍한 형제들은 자기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곧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느 것이 참 진리며 복음인가 하는 사실이비다. 그러므로, 그 올바른 자(말씀-캐논)에 비추어 사이비 기독교를 가려내고 새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심각하고도 중대한 문제인데, 우리는 이러한 의식이 없으므로 확신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고, 말씀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도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제일 큰 복으로 알고 있는 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교에서도 병을 고치며 방언을 하며 이적들을 행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출세와 부와 귀를 제일로 삼은 것은 구약성서의 복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된 경전은 오직 신약성서이며, 구약성서는 신약이 있음으로써 기독교의 경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만으로는 구원을 이를 수 가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약은 복음을 위한 그림자요 몽학선생입니다. 우리가 살게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이며,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말씀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빛을 다시 찾은 것이니, 그리스도의 복음(신약)이 없는 구약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 1--18 특히 15절).  
 또, 기독교는 우주적이며 전 일류구원을 목표로 한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서 당시의 뜻을 이루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외면하여 교회안에서만의 신앙생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한 사상)이나, 개인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은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요 3 : 17)  
 따라서, 기독교인은 우리모두가 부족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아래와 같이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빛이 있는 곳과 빛을 찾아 애쓰는 일에 긍정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빛이되어 그것을 부정해야 하며, 싱싱하고 맑은 곳이나 그 일을 위해 애쓰는 일에는 긍정해야 하나, 썩고 부패한 곳에서는 소금의 역할로 그것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 참 기독교인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어디서나 긍정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배자의 논리이므로, 이를 경계해야 하며, 어두운 곳, 부패한 곳이 많은 교회 내외에서 오히려 빛과 소금의 역할로 이를 부정하며 빛을 창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② 현재 많은 교회들은 구약의 율법으로 교우들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정죄의 법입니다. 10. 1조를 내야 하고 내지 않으면 절도범이 되어 징역을 가야 합니다. 이와같은 교리는 사망의 법이며 정죄의 법으로서 무서원하는 종의 영입니다 (롬 8: 1--4, 15) 이와같은 사이비 기독교를 간파해야 하겠습니다. 이와같은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 기독교, 참 복음주의는 속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나.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히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 (갈라디아 3: 1--3) ---  
 그래서, 저는 부족하나마 다음과 같은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존경할만한 많은 목사님, 신학자, 교회 지도자와 예수님의 참 몸으로서의 교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을 본삼아 말씀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로, 많은 교회들이 인본주의, 물질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 성장제일주의, 교권주의, 기복주의, 율법주의, 형식주의등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으나 그리스도의 행위는 없고, 십자가는 있으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은 없고 도리혀 사치와 풍요속에 나와 내 자식들의 출세와 축복만을 부추기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에 이와같은 이현실을 기독도로서 좌시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많은 교우들이 진리 아닌 것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교회경영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을뿐이므로, 이러한 현실속에서 교우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속아 살고 있는 불쌍한 교우들을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세째는, 사람이 탈취한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새 시대가 왔는데도 이와같은 진리 아닌 낡은 율법주의를 가지고 진리(참 복음)를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마 9:17)  
 기독교는 인생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는 중대한 내용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중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이비 기독교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진리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3. 끝으로,  
 저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합니다. 위하여 수고하신 많은 목사님들을 사랑하며, 교우들을 사랑하며 특히 우리 민족을 사랑하기 대문에 모두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특히 우리나라 한 복판에 세워진 중앙교회가, 하루속히 회개하고 소명을 깨달아 참 복음을 믿고(막 1: 15) 참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 불쌍한 교우들을 진리안으로 인도하며 세상 구원의 큰 사역을 감당하기를 비는 바입니다  
 (혹, 이 글을 읽으시고 의심이 나거나 토론을 원하신 분이 계시다면 주의 사랑 안에서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1996. 3. 1. 은퇴(隱退)에 즈음하여,

기독교 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종로지방 중앙교회
지 익 표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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