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7일 월요일

은사주의 비판-4

은사주의 비판-4

 * 목차
1. 표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2. 성경이 말하는 치유와 방언
3. 성령침례와 성령충만
4. 은사주의 운동과 뉴 에이지 운동


1. 표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표적과 유대인의 관계
은사주의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방언과 치유 -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신유(divine healing)라고 불려진다. - 의 이적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두 가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보다 더 자극적인 것일 것이다. 따라서 방언과 치유는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대한 일종의 "표적"으로 제시된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표적들의 연장선 상에서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도들의 표적의 계승자라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방언을 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사도행전 2장과 10장과 19장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방언을 한 사실에 기초한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표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적을 행하셨다면, 언제나 동일하신(히 11:8)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똑같은 방식으로 표적과 기적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적"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적"과는 다르다.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이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러한 표적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증거하시고자 하는 것을 청중들에게 입증하시는 데에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표적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마 8:27), 14장에서는 비슷한 사건 속에서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의 이러한 이적들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표적의 목적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으나 다만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20:30,31)
특히 예수님의 표적은 그 분이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왕국복음"과 더불어 이러한 표적들이 사용된 것을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마 4:23,24; 9:35).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자신이 왕이시라는 그 분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도구였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표적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고전 1:22).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탄생할 때에 표적과 더불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는 아브라함이다. 그러나 그들이 민족적으로 불러냄을 받은 것은 모세를 통해서였다. 표적, 특히 치유 의 이적은 이 모세에게서 처음 등장한다. 모세가 품에 손을 넣었다가 뺐을 때 문둥병이 생기고 다시 넣었다 뺄 때 치유되는 사 건이 있기 전까지는 적어도 성경 기록상 아무도 병들었다가 치유된 사람이 없었다(출 4장). 이집트인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고통 당할 때도 이스라엘은 그 고통을 면했다. 그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고통 당할 때는 놋뱀을 보고 치유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기울이고...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가져왔던 그 질병들의 하나도 너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는 주이기 때문이라"(출 15:26)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탄생할 때부터 표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물론 "표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기적적인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과 할례를 유대인에게 표적으로 제시하셨는데, 안식일과 할례는 전혀 기적적인 일이 아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일종의 언약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주장을 입증해 주는 도구였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표적과 더불어 탄생되었고, 표적으로 가르침 받고 양육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예언을 하실 때도 표적을 사용하셨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예언도 "표적"으로 제시되었다(사 7:14).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왕이 임하시는 것도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치유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질병의 치유가 왕의 표적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주의 날"에 대해 예언한 것이 성취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겔 34:16, 사 33:24; 35:6). 메시야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자들을 치유시키실 것이었다.
"그 거민은 나는 병들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거기에 거하는 백성은 죄악이 사해지리라"(사 33:24).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6)
이것은 천년왕국에서의 병든 자의 치유를 말한다. 질병의 치유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질병의 치유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그 분에 대한 예언과 이처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임하시기 위해 질병의 치유라는 "표적"을 행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은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왕국복음을 위임하시면서 역시 "질병의 치유"를 표적으로 주셨다.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 쫓으라.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마 10:7,8).
이러한 일들을 표적으로 주신 것 은 "너희가 이러한 표적들을 볼 때에 그가 너희의 왕임을 알라."는 것이었다.
왕국복음과 치유는 마태복음에서 계속해서 강조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치유(healing)라는 것 은 일차적으로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왕국복음과 관련해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마 10:5-7).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복음을 듣고 그 분이 행하신 이적들을 표적으로 보며 예수님을 따랐다(마 4:24,2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행하시던 표적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오류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행하시던 표적은 "메시야의 표적"(Messianic sign)이었다.

2. 표적으로서의 방언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메시야의 표적은 제자들에게 "사도들의 표적"(Apostolic sign)으로 계승된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왕국복음을 위임하시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사도들의 표적 역시 예수님의 표적과 같았다.
그들의 표적도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표적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방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여기서 방언이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의미없는 혼미한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외국어"였다는 것이다.
성경은 방언이 하나의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방언이 표적이라는 말은 방언이라는 현상을 통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어떤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방언은 "영적인" 언어도 아니며, 방언을 통하여 풍성한 영적 생활을 누리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해야만 성령체험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방언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 역시 "왕국복음"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에는 여러가지 표적으로 자신이 왕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떠나가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님이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성령님께서 오순줄에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했다(행 2장).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을 사람들이 알도록 하신 현상이 바로 방언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여러 나라의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고, 제자들은 이 일을 성령의 역사라고 설명했다. 제자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메시야를 전파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던 천국복음을 다시 전하면서, 너희가 바로 그 메시야를 죽였다며 회개를 촉구했다. 군중들은 예수라는 선지자가 죽은 이후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잊게 되었는데, 바로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을 빌어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왕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죽였다. 그런데 그 믿지 않던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아야만 믿는 백성들이다. 그래서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믿으라고 제시되는 표적이었다.
방언은 다시 사도행전 10장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도 유대인이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인 코넬료가 한다. 그러나 코넬료가 방언을 한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 믿지 않았던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표적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이미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내려주신 음식을 더렵다고 거부했다. 그는 이방인이 성령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설교를 하는 중에 성령께서 이방인에게도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행 10:44,45). 그때 베드로는 그 "표적"을 보고 이방인들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이 사실을 증거했던 것이다(행 15:8,9).
이와 같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믿도록 하기 위해 주어지는 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시에 이방인들은 이러한 목적으로 방언을 했다. 그리고 그 방언들은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 행위에 대해서 꾸짖게 되었다.
당시에 행해지던 일련의 표적들, 즉 방언과 치유와 마귀들을 내어쫓는 일들은 사도들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적들은 기본적으로 왕국복음이 전파되던 중에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표적들은 그분이 왕이심을 증명했다. 사도들도 그분이 왕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표적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스테판의 설교 때에 유대인들이 다시 한번 예수님을 거부한 사도행전 7장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는 어떠한 표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에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제시되는 이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점차로 사라져 갔다. 이러한 일련의 표적들은 왕국복음의 특징들이기 때문에 왕국복음이 사라져 가면서 이러한 표적들도 사라져 간 것이다. 열두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왕국복움을 전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거부로 왕국복음은 사라져 갔고 대신 바울 사도를 통해 은혜의 복음이 전개되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러한 책이다. 왕국복음이 전파되다가 사라지고, 사도행전 8장 이후로 은혜의 복음이 확장되면서 28장에 이르러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왕국복음은 전파되지 않고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은혜의 복음이 가득차게 된다(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이 유대인을 떠났다고 말한다). 이후로 바울서신에서는 교회의 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표적을 동반한 왕국복음은 교회의 휴거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다시 나타날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 2장의 내용은 마지막 날들에 성취될 예언이다.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계승해 표적을 행하였고, 왕국복음을 계속 전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거부로 인해(행 7장) 미래로 연기되었지만, 당시는 왕국이 임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표적은 행해졌다. 이 표적들(막 16:17,18)은 대환난 시기에 처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메시야의 재림 직전에 다시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과 치유라는 표적들은 유대인들과 관련한 왕국복음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에게는 처음에 나타났던 이적들이 사도행전 끝나가면서 사라져간 것이다(고후 12:7-9, 딤전 5:23, 딤후 4:20). 왜냐하면 왕국복음이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정확히 말하면 미래로 연기되었다).
표적은 사도시대 이후에 사라져 갔다. 그래서 교회의 교리를 다룬 바울서신에서는 육신적인 교회의 대표격인 고린도교회 외에는 방언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나마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금하고 있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을 주의해서 보기 바란다). 바울이 많은 방언들을 말해서 감사했던 것은 그가 많은 외국어를 구사해서 복음을 유용하게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언어감각이 남보다 뛰어나 외국어를 더 빨리, 또 많이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그의 달란트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다. 굳이 방언의 은사를 이 시대에 적용하려면 외국어를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좀 더 효과적으로 언어를 터득하게 되는 것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왕국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이 때에, 더구나 유대인과 관련되지 않은 이 때에 표적으로서 방언을 행한다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일이다.
방언은 표적이다. 치유의 이적도 표적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왕국복음의 표적이다. 이 왕국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재림) 의와 화평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이며, 이 표적들이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왕국은 팔레스타인에 세워질 다윗의 보좌로 대표되기에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이 시대에 누구든지 사도들의 표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다(계 2:2,3).


2. 성경이 말하는 치유와 방언
은사주의자들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언 25:14).
은사주의자들은 또한 "사도의" 표적들, 즉 표적과 이적(고후 2:12)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정작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내가 너희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 또 네가 어떻게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찾아낸 것...을 아노라"(계 2:2-3).
은사주의자들이 돈과 건강과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최근에 인본주의적인 정신요법(최면술)과 긍정적 사고방식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들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방언과 치유(신유)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교파적이며, 성경교리들을 논하고 연구하며 설교 하는 것을 몹시 꺼리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거부하면서도 "사랑", "나눔", 그리고 "연합" 등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선적으로 사랑과 나눔과 연합을 위해서 기록되지 않고 "교리"를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에(딤후 3:16) 성경은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에게는 닫혀진 책이다. 방언과 치유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올바로 공부하면, 그들이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1. 치유에 관하여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치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의 "표적"으로서(출 4:7-9) 모세와 함께 시작되었다(출 4장). 이스라엘 민족은 표적으로서 시작한 민족이었다(출 4장). 이것은 왜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가(고전 1:22)를, 또한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마가복음 16장의 표적들을 주셨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성경은 사도들의 사역 하에서 믿었던 사람들에게만 한시적으로 이러한 은사들이 부여되었음을 밝히고 있다(행 2,10,19장). 이러한 은사들은 고린도후서 12:12과 로마서 15:19에서 "사도의 표적들"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도직을 계승받은 것으로 주장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표적들"을 자신의 것으로 위조해야만 한다. 요한계시록 2:2과 고린도후서 11:10-14에서 이 사람들을 "거짓말쟁이"와 "거짓사도들", "기만하는 일꾼들",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정확하게 부르고 있다. 또한 그들은 데살로니가후서 2:9-10에 따라 한 은사주의자인 적그리스도가 오는 것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들(막 6:5,6)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치유하실 수 있다(약 5장). 예수님과 사도들은 단 한 번 의 실패도 없이 치유하셨다.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변명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은 이러한 변명을 통해 자신들의 거짓된 이적을 정당화한다. 그들에게 온 사람들 가운데 치유되는 사람보다 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인가? 사도들은 그들과 같지 않았다.
이적과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 2:9-10)
때때로 치유라는 것은 사탄적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병은 마귀에게 오고,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속단하면 안된다. 바울이 그의 약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의사인 누가와 동행하였는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허용된 뜻 안에서 누가와 동행한 것이었다(고후 12:1-8). 비록 여로보함이 팔을 고쳤지만 그는 가장 사악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나은 후에도 여전히 사악하였다(왕상 13장). 그래도 의심이 간다면 마귀였던 유다 또한 치유자였음을 잊지 말라(마 10:1-6)
하나의 표적(막 16:18)으로서의 "치유의 은사"(고전 12장)는 바울과 함께 끝났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이 끝날 무렵에는 바울도 자신의 동료인 트로피모를 치유할 수 없었으며(딤후 4:20), 디모데에게 약을 권하는 것에서(딤전 5:23) 분명히 드러난다. 성령님께서 은사주의의 이단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성경에 제시하신 최상의 증거는 바울이 그의 전생애를 통해 질병을 가지고 있었고 (고후 12:1-9), 그의 여행에 의사인 누가가 늘 함께 다녔다는 것과, 그가 죽을 때에도 누가가 함께 있었다는(딤후 4:11) 사실이다. 바울이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보다 능력이 없었겠는가?
은사주의자들은 이러한 말씀들의 주위를 배회하며 거짓말을 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은 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고후 12:7)가 실제적인 몸의 질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2:9-10에서 바울 의 "약함"이 단순히 어떤 문제들이지 실제적인 몸의 "약함"(질병)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몸의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사실이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는 것을 믿고 개별적으로 또는 합심해서 치유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치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이후로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어떤 특정한 사람(healer)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치유 (healing)는 성경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행한다는 사람(hearer)은 비성경적이다.

2. 방언에 관하여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은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4장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침례를 다루는 장들 가운데 하나이고, 고린도전서 14장은 "알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서 다루는 장이다. 사도행전 2장에는 성령침례가 나오지만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이 나타나지 않으며, 고린도전서 14장에도 전혀 성령침례가 나오지 않을 뿐만아니라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침례를 받는 것을 방언하는 것과 연관짓거나, 방언하는 것을 성령침례를 받는 것으로 연관짓는 것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다.
(1)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
첫째, 어느 누구도 어떤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서, 또 '방언'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위 '성령세례'나 '방언'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둘째, 성령침례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라 "거친 강풍 같은 소리"였으며(2절),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나는"것이었다 (3절). 3절에서의 불은 실제적인 불이 아니라 "불같은 모양"임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소위 '성령세례'를 받거나 '방언' 을 받는다는 순간에 이러한 증거가 없다면 그 역시 비성경적인 것이다.
셋째, 단지 열두 명만이 다른 언어로(방언으로) 말했다(행 1:26; 2:1,4,14). 120명의 제자들이 그곳에 있었는데(행 1:15), 그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108명은 오순절 때에 어떤 다른 언어로도, 즉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방언을 한 사람들이 누구 인가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사도행전 1:26-2:14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맛디아에게 떨어진지라, 그가 열 한 사도와 함께 계수되더라. 그 후 오순절 날이 되자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강풍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더라. 거기에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더니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우리가 사도들이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하니... 그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유대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아, 이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으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만일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라면 108명은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고,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한 성령에 의하여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다(고전 12:13).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가 누구든지 구원받는 순간이미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침례와 방언을 연관짓는 것은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은사주의자들이 거짓을 가르치는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은사주의자들이 방언과 성령침례를 그들의 주장에 맞게 가르치려면 최소한 네 가지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다른 언어로(방언으로) 말한 제자들의 숫자에 대해서(행 1:16-2:14), 즉 12명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방언을 했다고 거짓을 가르치게 된다.
둘째, 성령침례의 증거에 대해서(행 2:2,3), 즉 "거친 광풍같은 소리"와 "불같은 모양의 갈라진 혀들"이 아니라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거짓을 가르치게 된다.
셋째, 성령침례를 받는 방법에 대해서(행 2:1-3),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이미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방언을 위해서 따로 받아야 한다는 거짓을 가르치게 된다.
넷째, 방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행 2:4-11), 즉 방언은 "다른 언어(외국어)"가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실상은 의미없는 소리이다.)이라고 거짓을 가르치게 된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들"(tongues)은 모두가 오늘날 행해지는 혼미한 소리들이 아니라 실제적인 "외국어들"(tongues)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사도행전 2:4-11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당시 예루살렘에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각자 태어난 나라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 말인가? 파대인과 메데인과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들과 유대와 캅파도키아, 폰토와 아시아, 프루기아와 팜필리아, 이집트와 쿠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방과 로마에서 온 여행자, 즉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크레테인과 아라비아인들인 우리가 사도들이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하니』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이 하는 방언이 분명한 외국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혼미한 소리라면 그는 비성경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첫째, "알지 못하는" 방언(고전 14:2,4,13,14,27)이라는 말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항상 "듣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하는 방언, 다른 방언, 여러가지 방언 그리고 알지 못하는 방언이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으로서 서로 교환해서 사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과만 교통하는 것이고 자신들은 무엇을 말했는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은 방언을 한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성경 변개자들은 은사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이 뒷받침될 수 있도록 성경을 변개시켰다. <개역한글판성경>의 고린도전서 14:1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spirit)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mind)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개역한글판성경>에 따라 고린도전서 14:14을 읽으면, 바울의 "마음"은 자신의 입으로 한 말들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변개된 다른 한글성경들과 영어 성경들(NASV, NIV...)도 "mind"라는 말을 "spirit"과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말씀은 어떤 것인가?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spirit)은 기도하는 것이지만, 나의 지각(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이와 같은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경 변개자들이 "지각"(undestanding)을 "마음"(mind)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지각을 마음으로 바꿈으로써 어떤 주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고린도전서 14:14의 전후 문맥을 살표보면, 알지 못하는(말하는 사람은 알지만 듣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한 사람이 기도했다면 그 기도에 아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도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에 반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16,17절). 즉 고린도전서 14:14-17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즉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바울이 기도했다면 그가 말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바울 자신은 무엇을 기도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실제적인 언어로 기도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각"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뜻이다. -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를 알아 들을 수 없고, 그의 기도에 대해서 아멘 하거나 어떤 반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지각"(자신이 다른 사람이 알아 들었는지 못했는지에 대한 판단)으로는 알 수 없다는(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그로 쓰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거나, 각기 통역이 다르게 되는 방언(의미없는 혼미한 소리들)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방언이 아니다.
<개역한글판성경>을 비롯한 변개된 성경들은 "지각"을 "마음'으로 바꾸는 오류를 범했으며, 또한 "마음"(mind)이라는 말을 "영"(spirit)과 대비되는 용어라고 잘못 표현했다(고전 14:14,15,19). 그러나 성경은 로마서 7:25,에서 "mind"(생각)와 대비되는 말은 "flesh"(육신)임을 밝히고 있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5:3에서 "몸"(body)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spirit)으로는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mind"와 대비되는 말이 "spirit"이라고 표현된 곳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 즉 자신 스스로 알 수 없는 방언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방언이 아니며, 은사주의자들이 고린도전서 14:14-17을 근거구절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개역한글판성경>과 같은 변개된 성경으로만 가능할 뿐이고,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성경으로는 그 오류가 바로 잡히는 것이다.
둘째,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표적"이었다(고전 14:22).『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따라서 방언은 신약 전체에서 세 번 등장하는데(행 2,10,19장), 세 경우 모두 방언은 유대인들을 믿게 하기 위한 하나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현재 행해지는 방언은 유대인이 하거나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 행해지고 있는 방언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셋째, 남자들은 반드시 차례를 따라서 한 번에 셋이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전 14:27). 그러나 현재 행해지는 방언은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다.
넷째, 통역이 없이는 아무도 방언을 해서는 안된다(고전 14:27). 이는 분명한 언어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통역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 방언(언어)을 아는 사람이면 같은 통역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방언은 통역하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통역하기 때문에 역시 비성경적이다.
다섯째, 여자는 회중들 가운데서 방언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14:34). 그러나 현재 행해지는 방언은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역시 비성경적이다.
여섯째,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부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전 14:2-3,4,5,6,7-11, 17,19,23-25,37-40).
고린도전서 14:37에 영적인 사람에 대한 표시가 나타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았든 구원을 받지 않았든 육신적인 사람이며(고전 14:38-40,20), 또한 마귀에게 계속적으로 속아온, 성경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자들이다.


3. 성령침례와 성령충만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해로운 두 가지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 와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다. 왜 이들 두 교리가 비성경적 교리인가? 극단적 칼빈 주의를 교리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구령하지 않는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창세 전에 정해진 것이 하나님의 예지요, 예정이기 때문에 구령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모은 사람들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들이지 그리스도인들은 적다. 이들은 세상의 영(마귀)이 다스리던 세상에 있던 사람들, 즉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사람들을 영적 전쟁을 통해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오는 것이 교회의 지상 과제인데도 구령은 하지 않고 교회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면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유기체)에 한 지체로(organic element) 들어가는 것이다. 그 지체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을 공부하며, 구령하고 선교하며, 성도들이 교제하는 곳이 지상에 있는 지역교회(Local Church)이다. 이 지역교회 회원은 알곡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지 쭉정이 교인들의 모임이 아니다(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리 교회만 왔다 갔다 해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서는 그 교회 회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극단적 칼빈주의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화를 내며 반박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나의 주장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고 하셨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지옥에 가게 된다. 지옥이 어떤 곳이 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는 말인가!
다른 종교에서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고, 영혼 구원에 대한 보장도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을 성경을 통하여 가장 확실하게 믿는 것이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닌가! 그런데 믿겠다는 사람에게 가짜 표를 주거나 차가 오지 않는 정거장에서 기다리게 함으로써 하늘나라행을 놓쳐 버리게 만들고, 그대신 지옥에 가게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런 사람들은 지옥의 실체를 모르는 것이 분명하며, 죽은 자의 부활도 산 자의 휴거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천년왕국도 영원세계도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 사람은 존 칼빈(John Calvin), 벌콥(berkhof), 댑니(Dabny), 카이퍼(Kuiper), 핑크 (Pink), 핫지(Hodge)가 가르친 학문을 성경보다 더 높이 인정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보수주의, 근본주의자로 자처 하는 목사,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학위, 특히 잘 알려진 인가난 학교의 학위면 더욱 신뢰한다. 성경대로 가르치는 인가 없는 신학교와 성경을 무시한 채 교수들이 주관적 이론으로 공부하고 그에 따른 학위를 받는 교단 신학교 중 어떤 것이 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학교인가?
은사주의자들은 약간 다르다. 이들은 믿음보다는 감정이나 체험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미혹하는 교리 때문이며, 이 미혹하는 교리는 주로 성령세례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생동감 넘치는 교회처럼 손뼉도 치고 통성 기도도 하며, 팔을 높이 들고 '성령이여, 할렐루야!'를 외쳐대고 방언한다고 하지만 실로 속은 텅비어 있는 죽은 교회이다
라오디케아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는 교단 교리를 성경보다 존중하는 교회들과 성령세례로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는 은사주의 교회들이다. 주님은 이런 교회들을 계시록 3:17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계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네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상식과 판단으로는 거짓 교리들이 확산되지 않을 것같이 보이지만 계속 확산되는 것은 모이는 집단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주 낮고 거짓교사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계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역은 직업이지 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주지도 않으면서 그런 가짜 교리를 가르치라고 하면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1년에 500,000명 정도가 구원 받는다고 한다. 이 중에서 올바로 믿음의 뿌리를 내려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 성장 하는 사람은 겨우 100명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나머지 499,900명은 어디로 갔는가? 이들은 극단적 칼빈주의, 은사주의, 침례로 구원받는다는 교회, 극단적 세대주의(세대주의와 다름), 심지어 크리스챤 사이언스,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들에게까지 끌려 가는 것이다.
거듭난 영혼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는 구원받고 난 직후이다. 자기의 몸과 혼과 영을 성령님의 주관과 인도하심에 내어 맡기려고 할 때 악령도 발악을 하여 그 영혼의 파멸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구령한 후에 악령의 계략이 즉각적으로 작용한 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 사람이 적어도 4주에서 7주 정도는 믿음으로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듭난 후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전보다 훨씬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가서 성경지식이 혼미하게 되거나 성령 세례, 방언, 은사 등등을 흉내내려 하다가 자신의 믿음이 아직 움도 트기 전에 망가뜨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함 목사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을 사람을 초청하기는 하나 '다음 주에 교회에 가라.'고 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어떤 교회로 가란 말인가? 나무 십자가를 믿는 교회로 가란 말인지, 물 뿌리는 교회, 아니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교회, 어느 교회로 가란 말인가?
빌리 그레함 목사는 누구든지 구령했으면 "성경대로 믿는 교회"로 가라고 해야 마땅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관장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흉내내는 일이다. 성령의 역사와 꼭 닮은 가짜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가짜(Counterfeit)를 분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자기 감정과 기분의 변화를 성령 께서 역사하시는 일로 착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이 억지를 쓰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마귀에게 붙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거짓은 시작된다.
육신적인 교회였던 고린도 교회에서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간음한 자도 있었다. 당신은 거듭난 후 죄를 지은 적이 없는가?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에 마귀에게 희롱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무척 바보스러운 생각 이다(롬 6장). 죄를 지으면 누구나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성령세례의 교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오순절(행 2장)과 연관해서 이 문제를 살펴 보자. 성경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지 성령침례를 받으라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오순절은 침례뿐만 아니라 충만도 언급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행 2:4). 침례와 충만은 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침례는 '잠긴다'(Immersion)를 뜻하고, 충만(Filling)은 어떤 데다가 무엇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오순절에는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오순절은 먼제 성령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새 세대를 열어 주신 시기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했던 말은 외국어이지 '나볼레고볼레시꾸렁지꾸렁'이 아니다.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각자 태어난 나라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 말인가?』(행 2:7,8). 한글개역성경이 이 부분들을 '방언'으로 번역하였기에 순진한 사람들은 이것을 방언으로 알고 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자기도 모르고 내뱉는 알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라 외국어, 즉 그들이 듣고 알 수 있었던 외국어였음을 주의하여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거듭났을 때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고전 12:13). 그들이 방언을 말했던 것은 믿는 성도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참조 - 행 10:44; 2:1-5). 방언은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준 것이다. 사도행전 2장까지는 신약성경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교리도 정립되지 않았고 아직 교회도 없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믿는 사람들이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메추리, 반석에서 나는 생수,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고 요단강 물을 멈추게 하는 등등 수 많은 표적을 보고 믿어 왔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시대의 이단들은 사도행전 2장과 오순절을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또 하나의 계기로 삼는 듯하다. A.D. 32년의 오순절은 특별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몸에 거하시기 위하여 오신 날이다. 그 이후로 1992년까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중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교회사에 이런 은사주의로 거짓말하는 교회는 한 번도 신약교회에 등장한 적이 없다. 사도행전 2장으로 여러분을 오도하는 사람은 성경 교리를 거부하게 하며 타락시키는 주범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의 현저한 양상은 바른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사랑으로 교리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며 사랑을 강조한다. 교파를 초월할 수 있었다면 아예 무슨 교단의 설립이 필요하며 교리의 정립이 필요했을까?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하셨으니』(딤전 4:1)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 2:38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으로 적용시키고 있는 무지한 교사들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베드로는 지금 그들이 고대했던 메시야를 죽인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10:43과 15;11에서 전한 메시지와는 다른 것이다. 여기의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참예한 유대인들로서 할례받고, 수염을 기르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안식일을 키지며, 성전에서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람들도 아니고, 미국 사람들도 아니며, 어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아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거듭남도, 구속도, 영적 할례도, 그리스도의 교회도 언급하지 않았다.
열두 사도들이 세 경우에 외국어로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려는 것이나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첫째, 사도들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말한 사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였다. 둘째, 사도행전 19장에서 침례인 요한의 제자들이 진리를 받았음을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로 알게 하려고 외국어로 말하였다. 셋째, 사도행전 10:44에서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물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유대인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하였다.
마치 이들은 마가복음 16:16-18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함을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또 새 방언들로 말하리라. 그들은 뱀들을 집을 것이요,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이적들의 대부분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진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다. 뱀을 집은 것은 바울이 마르타 섬에서 한 것 외에는 아무도 독사를 만진 적이 없었다. 독약을 마셔도 괜찮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거짓 목사에게 농약이라도 한 병 갖다 주고 마가복음의 이 구절을 펼쳐 보여 주라.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지 보라.
거짓말을 하는 가짜 목사에게 온갖 잡새가 날아들 것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처럼 주장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무디(D.L. Moody),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짚시 스미스(Gypsy Smith), 라일리(W.D. Riley), 토레이(R.A. Torrey), 윌버 챠프만(Wilbur Chapman), 멜 트로터(Mel Trottor), 리 스카브로쉬(Lee Scaboroush), 프랭크 노리스(Frank Norris), 올리버 그린(Oliver Green), 디한(DeHaan), 데오도르 엡(Theodore Epp), 챨스 풀러(Charles Fuller) 등
성령세례와 방언을 이야기하는 은사주의자들이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또 하나의 허구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세계성령화 대회'가 무슨 말인가? '성시화'가 무슨 말인가? 성경을 안다면 성경에도 없는 말을 지어내서 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성령님이 예수님인가? 예수님은 없고 성령만 부르짖는 그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인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왜 진리에로 인도를 받지 못하고 진리도 아닌 것에 끌려가고 있는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담대하게 복음은 전하지 않고, 진리와 거리가 먼 성령화 운동이니 성시화 운동이니 그런 비성경적 운동이나 하고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바른 교리를 알고 그 교리대로 실천해야 한다(딤전 2:15). 바른 교리를 아는 사람은 성경도 아닌 존 칼빈의 교리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할례받은 유대인들처럼 오순절에 침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데 거짓 교사들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되지 말라고 형제들에게 경고했는지도 모른다.


4. 은사주의 운동과 뉴 에이지 운동
은사주의 운동을 몇 가지로 특징짓자면 방언, 신유, 입신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인 체험으로까지 이끄는 요소로는 찬양을 들 수 있다. 과거 60, 70년대에 우리나라의 은사주의 운동을 대표하던 것은 기도원과 부흥회였는데, 이 당시 부흥집회를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큰 북을 치면서 노래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때로는 부흥사의 설교가 고조될 때마다 청중들의 "아멘" 소리를 더 크게 하기 위해 맨 앞에 앉은 사람이 북을 크게 치기도 했다.
이 당시 주로 불려지던 찬양은 "불길같은 성신여",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빈들에 마른 풀같이" 등이었는데, 박수를 치면서 이런 노래를 크게 부르면 자기도 모르게 성령충만한 것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었다. 특별히 밀폐된 공간에서 이러한 시끄러운 분위기를 타고 통성으로 기도하다 보면 방언을 받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만약 이러한 분위기를 통해서도 방언을 받지 못 하면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든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같이 감정을 자극시키는 노래를 통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지막에는 부흥사들이 청중들의 머리에 안수를 하며 "할렐루야" 같은 말을 계속 반복시킨다. 이쯤 되어도 방언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 날 부흥회에서 스스로 은혜를 덜 받은 것 같아 낙심하게 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신비주의에서 체험이 유도될 때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 때때로 이러한 분위기는 시끄러울 수도 있고, 카톨릭이나 뉴 에이지 명상과 같이 조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크게 작용하는 것은 음악이다. 개신교의 부흥회 운동은 주고 시끄러운 음악이 사용되었다. 분위기와 음악을 통해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것은 비단 기독교 뿐 아니라 타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나 뉴 에이지 운동가들의 명상음악, 로마 카톨릭의 신비한 미사곡들, 고대 브리튼 섬의 부두교도들의 북소리, 불교도들의 리드미컬한 주문 등, 이런 음악적 요소를 통해 이교도들도 입신이나 방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은사주의 집회에서 사용되던 음악을 살펴보면 이렇다. 70년대에는 주로 앞에서 언급한 성령에 관한 노래들과 조금은 한이 담긴 듯 한 트롯트 계열의 복음성가가 있었고,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는 록음악 형태의 가스펠송들이 조금씩 등장하면서 개방적인 교회에서는 드럼의 사용이 허락되었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건전가요 형태의 복음성가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되었으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약간은 부드러운 록(soft rock)과 약간은 발라드가 섞인, 거기다가 약간은 뉴 에이지적인 음악이 가미된 경배와 찬양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복음성가의 흐름을 보면 세상 음악의 흐름과 거의 맞물려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마지막 형태의 음악은 현대 은사주의 운동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음악은 젊은이들을 은사주의 운동에 가담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찬양은 "영적인 노래"(엡 5:19, 개역성경)로 불려지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노래들은 전혀 신령하지 않다. 어른들이 "불길같은 성신여"를 부르며 방언을 한다면 젊은이들은 발라드 곡을 부르며 방언을 하고, 흑인들은 리듬 앤 블루스를 부르며 방언을 하며, 브라질 사람들은 삼바음악을 부르며 방언을 한다. 이쯤되면 우리의 어린이들이 조금 자라면 랩음악을 하며 방언을 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이 하는 찬양 아닌 찬양은 육신적인 노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론토의 빈야드 운동이 소개된 것은 매우 적절했다. 그들의 노래는 이미 국내에 퍼져 있던 경배와 찬양 형식의 노래들이었고, 그들이 행하는 방언과 치유와 안수는 이미 수 십년 동안 한국교회 은사주의 운동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내용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에게 같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더우기 이 운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교회성장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다.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특히 젊은층이 줄어드는 현 상황에서 이 운동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또한 기존의 은사주의 집회의 특징이 우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빈야드 은사운동의 특징은 웃는 것인데, 이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교회성장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은사주의 운동이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 운동처럼 음악과 분위기에 좌우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 운동이 마귀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음악은 오래 듣고 있거나 오래 노래부르면 집단최면에 걸리는 효과가 나타난다. 대중가수들의 노래에 청소년들이 반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은사주의 집회에 가서 밀폐된 공간에서 박수 소리에 같은 말을(예를들어 "주여"나 "할렐루야" 등) 수 없이 반복할 때 혼미한 소리가 나오는 것은, 물론 훈련에 의한 방언이지만, 이것은 일종의 집단최면이다. 만약 여기서 무의미한 같은 말을 반복하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방언을 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마귀의 역사이다.
특히 전자음악을 사용하는 현대 은사주의 집회는 더 심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사탄이 음악을 타락시킨 결정적인 공로는 전자음악을 개발한 것인데, 특히 신디사이저 같은 혼합된 소리로 사람의 감정을 미묘하게 만드는 육신적인 음악에다가, 아무리 복음적인 가사를 붙여 노래부른다 할지라도 같은 형태의 노래를 몇 시간씩 부르면서 분위기에 압도되면, 집단 최면에 걸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토론토 빈야드 운동에서 나타나는 웃음 또한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간증"을 들어보면, '주체할 수 없이 웃었다." "나는 일어서려고 했는데 일어설 수 없었으며, 누워있는 상태에서 웃을 수 밖에 없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한 요소는 "절제"라는 것이다(갈 5:23). 성령님께서 무엇때문에 절제할 수 없는 웃음을 주시는가?
안수를 받을 때 뒤로 넘어지는 현상도 마음을 비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빈야드 집회에서는 한 사람이 안수를 하면 안수받는 사람이 뒤로 넘어져 다칠까봐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2인 1조로 다닌다고 하는데, 빈야드 운동이 들어오기 전에도 국내에서 마귀쫓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몇몇 교회에서 이러한 형태의 안수를 종종 했었다. 그러나 만약 성령께서 넘어뜨린 다면 왜 받쳐주는가? 넘어뜨리시는 성령께서 그를 다치게 하시겠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자기 최면 등을 이용한 마귀 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역사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낫게 한다. 마태복음 17장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미친 한 아이가 나오는데, 마귀는 그를 불 속에도 넘어지게 하고 물 속에도 빠뜨렸다(마 17:15), 마귀는 그를 "넘어지게" 한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에는 그 아이가 미쳤다는 말을 "lunatic"이라고 표현하는데, "luna"라는 말은 "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달을 보고 웃는 미친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주체할 수 없이 "웃는" 것은 상식적으로 봐도 온전한 행동이 아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가다라 지방에서 군단 마귀에 사로잡혀 무덤에 살고 있던 사람이 치유된 후 앉아 있고, 정신이 온전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15).
입신, 또는 혼이 빠져나가는 현상은 다른 모든 현상 보다도 더욱 마귀적이다. 입신을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경에서 근거 를 찾아, 사무엘상 10:10에서 사울이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해 예언했던 것을 예로 든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람에게 들어 오셨다가 다시 나가기도 하시던 구약적인 개념을,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신약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사람이 거듭나서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서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상태에서 말하게 한다는 것은 전혀 신약적인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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