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윌리암 윌버포스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기 복음적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숙부와 살았다.
숙부는 노예 상인이었다가 찬송가 작가가 된 존 뉴턴의 친구였다.
1780년 대학 동창생 피트와 함께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의회 개혁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다.
그 후 1784∼1785년 유럽 여행 중에 그의 교장이었던 아이작 밀러와 토론을 하면서 유명한 종교 서적
「영혼에서 종교의 발생과 진보」와 성경을 읽는 중에 심도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됐다.
이로써 그는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이 되었다.
윌버포스는 1785년 후반에 영적인 회심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습관들을 모두 버렸다.
그의 중요한 공적 경력을 모두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다.
1787년 그의 노예 해방 투쟁은 하원의 노예 문제 개혁 운동의 지휘를 떠맡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일에 대한 동기와 결의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윌버포스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 판매, 노예 제도를 통해 생산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 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 제도 폐지를 전개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 하원은 그에게 유례 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 무역 폐지법'(Th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다.
그는 박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해외 선교 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1833년 '노예 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웨슬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교회와 채플(비국교도들의 교회당)의 문들이 모두 열렸고, 해방된 노예들이 몰려들어
대만원을 이루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영 제국의 악법과 맞서 싸웠다.
그는 삶 속에서 매력과 재능 그리고 웅변의 능력을 사용하였다.
날카로운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진 이 아담한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의회 연설가였다.
그의 어조는 독특하고 음악적이어서 그의 정적도 그의 연설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윌버포스는 1833년 8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는 오늘날 영국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 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깊은 영성과 실력을 구비한 평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총체적 부패 속에서도 의와 양심을 포기하지 않은 지도자의 모범을 보였다.
사회악과 맞선 ‘영국의 양심’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개인은 무력하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구조적인 악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라고 결론 짓고, 그로 인해 무기력증후군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꿈이 없으면 안일이나 좌절, 이기심의 수렁에 빠져서 파멸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탁월한 정치인이요, 부유한 요크셔 상인의 아들이었던 윌버포스는 자신의 이 비전이 당시 영국 사회에 가져 올
파문을 잘 알고 있었다.
구조적인 악, 노예 무역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한 권위 있는 통계에 의하면, 영국이 1776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의 식민지에 공급한 노예 수는 약
3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당시 노예 무역은 영국 식민지 산업의 기둥이자 근간이었으며,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 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탁월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신병 모집의 근거를 제공했다.
노예 무역은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들을 고용했고, 그것의 고용 효과는 약 16만 톤의 선박과 그에 비례한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따라서 노예 무역의 지지자들은 막강한 상인, 재벌, 넬슨 제독 같은 식민지 기득권 세력, 대부분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어 그 어떤 반대의 소리도 매국으로 치부해 버렸다.
노예 무역은 그야말로 구조적인 악이었다.
승리로 이끈 위대한 행동
왜소한 체구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대(對) 의회 논쟁을 통해서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고집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암살 위협과 갖은 중상모략,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수 많은 뜻 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롭고 기나긴 싸움을 버텨 나갔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드디어 영국 의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노예 무역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제도를 20년에 걸친 의회에서의 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가난한 이들이 병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하였다.
과다한 노동 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 교육을 시키고, 취업을 알선하는 제도를 정부가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제도를 대폭 개정했다.
가난한 자들도 합리적인 재판 과정을 거칠 수 있게 했으며, 형벌 제도에 있어서 벌보다는 갱생(更生)에 초점을 두게 했다.
또한 상류 사회 남자들의 결투 제도 폐지에 앞장섰고, 호화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 봉사에 쏟도록 했다.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의회 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 윌버포스
많은 역사가들은 윌버포스가 노예 무역 금지라는 인기 없는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 윌리엄 피트에 이어
수상직을 계승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확고하게 결심하던 날, 이미 개인적 야망을 버렸다.
그는 자기 이익이라는 독재자와 대결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그런 용기의 대가로 그는 모욕과 반대와 수치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거꾸로 자유라는 새로운 유산을 그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 수많은 흑인들에게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이익과 성공을 지향하고 있다고 너무나 자주 치부되는 이 시대에 윌버포스의 생애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곳, 바로 영국 의회라는 전쟁터에서 불의에 맞서 싸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였다.
세상 문제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개인적 신앙의 게토(ghetto) 속에
도피하든가, 불신자들이나 다름없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리고 윌버포스가 한 일들은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조직과 비인간적인
권력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개인이 더 이상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전능하신 분이시다.
인간에게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윌버포스가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을 타개한 것처럼, 구조적인 악이어서 도무지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악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헌신된 사람들을 절실히 찾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준 윌버포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보냈던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