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법보다 위대한 사랑

법보다 위대한 사랑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동물이 사는 정글은 양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된다. 법은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적 문화 규범이요, 최후의 보루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범법을 하면 벌을 받는다. 인간 사회는 근대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법의 역할이 더 강화되고 체계화됐다. 특히 현대 사회는 법에 대한 관심이 많다.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도 현 사회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저항 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지금 사회는 공정한 법질서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법 지상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법은 인간 사회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특별히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거나 욕망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법은 최후의 수단이요, 보루가 돼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너무 법만을 좋아하다 보면 법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 해도 훌륭한 요리사의 손에 들려지면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강도나 도둑의 손에 들려지면 다른 사람을 약탈하는 흉기가 된다.

교회도 점점 부흥하고 대형화되면서 조직이나 정관(법)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본질인 말씀과 성령, 은혜 등을 섬기기 위한 도구로서 필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법이 본질을 강제하고 지배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겉으로 볼 때는 정의와 개혁을 말하지만 법을 앞세운 또 다른 욕망의 발로요, 기득권 싸움의 파괴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크고 작은  교회와 교단, 교계 등에서 얼마나 많은 법정 싸움으로 몸살을 앓으며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바닥까지 추락하고 있는가. 사랑보다 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왔던 사건을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공정한 법 집행을 요구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온갖 미움과 비열한 증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한다. 만약 죄 없는 자가 여인을 돌로 친다면 유일하게 딱 한 사람만이 돌을 던질 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법을 초극한 위대한 사랑으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셨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법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져 형제처럼 지내던 성도끼리도 반목하고 목자로 섬기던 지도자에게까지도 심판의 돌멩이를 던지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제 법만 앞세우며 서로를 정죄하는 증오와 다툼, 파괴의 악몽에서 깨어나자. 심판의 돌을 들기 전에 참회와 용서의 눈물을 쏟자. 사랑, 그것은 법보다 더 위대한 것이기에.

소강석목사<용인 새에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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