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사랑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우리를 행복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
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간혹 사랑의 힘으로 죽음을 이겨내고 환경을 변화시키며 삶을 아름답게 일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행복의 필수요건이며, 사랑에는 삶
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에는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하며 남녀 간에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일, 그러한 관계나 상대라
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높은 차원의 사랑, 곧 영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당장 눈앞의 유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한결같은 사랑과 우정
요나단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
하며 깊은 우정을 쌓아갑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에게라면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
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 하였더라” (삼상 18:1~4)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다윗의 존재가 어쩌면 눈엣가시처럼 곱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
을 수 있는 후계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
안이 되었을 때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줍니다.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 하였도다” (삼
하 1:26)
왕이 된 다윗은 요나단을 생각하며 그의 하나뿐인 아들 므리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줍니
다(삼하 9장).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하나님께서는 흠도 티도 점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
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지으신 피조물들의 손에 의해 온갖 핍박과 조롱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촛밀같이 녹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 인생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셨으니 이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며 변
함이 없는 영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영원히 변치 않으며, 식언치 아니하시며 후회치 아니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진실
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자신을 진정 희생해 줄 수 있는 사랑이어서 참사랑이라 할 수 있는 숭고하고 고상한 사랑입니다.
또한 썩어지지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참된 만족
을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있습니다. 고린도전
서 13장에는 참된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한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영적인 사랑,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진리로 변화된 사람이라면 서로 간에 얼마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
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영적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사랑을 점검하는 방법
간혹 사람들 중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참사랑을 이루었는지 측정하기 위해서는 시험과 연단을 만났을 때 마음과 행함을 살펴보면 됩니다. 얼마나 중심에서 기뻐하
고 감사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지 살펴볼 때 참사랑을 이룬 정도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원망 불평하며 세상 방법을 찾고 사람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을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
다. 마치 위조지폐가 진짜 돈 같아 보이지만 종잇조각에 불과하듯이 지식으로 아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주님을 향한 마음이 변함없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만큼 참사랑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내가 사랑을 베푸는 데 있어서 내게 돌을 던지는 사람, 또는 내게 오는 시련들과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에 대
한 오래 참음과 내 개인에 대한 오래 참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적인 입장에서 누가 나를 미워해도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
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
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주일 아침, 하루는 한 남자 성도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사연을 들어 보니 자신이 술만 먹으
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가족을 괴롭히며 매우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한 결 같이 참고 자신의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
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고 알코올중독 증세까지 보이니 아내는 그만 삶의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분이
술 때문에 가족을 힘들게 했지만 그래도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나온 것입니다.
사연을 들은 뒤 그분에게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면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이 뭐 어렵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사랑의 시작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오지는 않습니까? 오래 참았는
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었다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즉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의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
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
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상대를 이해해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
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습니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9)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0)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이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
이 없습니다.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
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합니다.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인 것입니다.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를 맺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
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저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
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
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
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
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 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
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
화되기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
거나 짜증 낼 일도 없습니다.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 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원수를 친구로 만든 링컨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변호사 시절 스탠톤이라는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스탠톤은 학벌과 가문이 뛰어난 반면에 링컨은 가
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탠톤은 링컨을 얕잡아 보고 곧잘 심한 말로 조롱했습니다. 링컨은 비방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분노하거나 악한 말로 갚지 않았습니
다. 오히려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가 요직인 국방부 장관으로 스탠톤을 지명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가 적격자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저격을 당해 쓰러졌을 때 동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는 가운
데도 스탠톤은 링컨에게 달려갔습니다.
링컨을 안고 눈물 흘리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
링컨 그는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사랑의 오래 참음은 원수도 친구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 37:8~9).

주님을경외하는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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