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시험대 오른 노르웨이의 국가안보


공군은 헬리콥터 준비 안되고, 경찰은 보트 타고 현장 도착
브레이빅, 폭발물 테러로 시선 끌고 노동당 청년 캠프 노려

 

지난 7월 25일 15만 명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시청 앞 광장에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모여 들었다. JONATHAN NACKSTRAND/AFP/Getty Images

 

지난 24일(현지시간) 옌스 스톨텐베르크 노르웨이 총리는 극우 테러로 숨진 희생자를 기리며 오슬로 대성당에서 추도연설을 가졌다. 스톨텐베르크 총리는 이번 테러를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참사”라 부르며 테러 용의자 베링 브레이빅의 테러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컬었다.


노르웨이 국민은 물론 세계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일은 사건이 발생한 후에 보여준 노르웨이 정부의 대응이었다. 한마디로, 총리실에서 법무부, 경찰에 이르기까지 정부 모든 부문이 테러 공격에 무방비 상태였다.


지난 22일 오후 3시20분, 오슬로 중심에 위치한 정부청사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후 경찰은 테러 현장을 막고, 수십 명의 부상자를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노르웨이 일간 ‘VG’ 신문의 한스 헨리크 토르게르센(Hans Henrik Torgerse) 기자는 전화 통화에서 이 모든 과정이 “1시간 걸렸다”고 꼬집었다.


경찰은 오슬로 중심부에 대한 통제를 실시했다. 하지만 토르게르센 기자에 따르면 테러 발생 직후 오슬로 지하철에 대한 통제는 없었다고 한다. 국가안보와 테러리즘 부문 전문기자인 토르게르센은 오슬로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도로에 대한 통제도 없었다고 했다.


지하철과 도로 통제에 실패하면서 브레이빅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오슬로를 떠날수 있었다. 그리고 약 30분 후 오슬로 북서쪽에 위치한 연안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널에서 브레이빅은 우토야 섬으로 향하는 페리에 올라탔다.

 

강 건너 보이는 섬이 극우주의자의 테러가 발생한 우토야 섬이다. 휴양지로 유명한 이 섬에서는 1950년대부터 매년 노동당 청년 캠프가 열렸다. Jeff J Mitchell/Getty Images


지옥으로 변한 휴양지 섬


우토야 섬에서 매년 열리는 노동당 청년캠프는 노르웨이 언론들의 표현을 빌면 ‘노동당 운동의 접착제’ 역할을 해 왔다. 노르웨이 노동당은 1950년대부터 매년 이 섬에서청년 캠프를 열어 미래 지지자들을 키워왔다.


페리에 올라 탄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경찰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 페리에는 수년 간 노동당 청년 캠프 조직위원장으로 일한 모니카 보세이(45)가 타고 있었다. 당시 같은 배를 타고 상황을 목격한 하콘 샌드바켄(19)에 따르면 보세이 위원장은 무장을 한 브레이빅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고 한다. 오슬로경찰은 소총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무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보세이 위원장이 무장한 경찰을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샌드바켄에 따르면 당시 브레이빅은 등이 뻑뻑하게 굳은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페리가 섬에 도착하자 브레이빅을 수상하게 여긴 보세이는 노동당 청년조직 건물로 곧장 달려갔다. 거기서 보세이는 전직 경찰이며 캠프 안전요원으로 일하는 크론드 베른센과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때 브레이빅이 나타났고, 보세이와 베른센을 쏘았다. 우토야 섬 학살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었다.


브레이빅은 범행 전 작성한 문건에서 정부청사 폭발은 ‘속임수’에 불과했다며, 진짜 목표는 우토야 섬 노동당 청년 캠프였다고 썼다. 그에게 이 청소년들은 노동당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다음 세대로 여겨졌기에 그는 바로 이 유전자 자체를 없애고자 했다.


브레이빅의 문건을 전부 훑어 본 토르게르센 기자는 경찰 복장은 훔친 것이 아니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문건에서 브레이빅은 초등학교 때 있었던 바느질 수업 시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놨는데 나중에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썼다”고 말했다.


9년에 걸친 범행 준비


노르웨이인들은 테러용의자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경찰의 늦장 대응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우토야 섬 학살 현장에 출동한 것은 노르웨이 특수기동대(SWAT)였다. 노르웨이 외교연구소(NIFA) 헬게 루라스 박사에 따르면 노르웨이 공군 헬리콥터가 마침 그날 준비가 돼 있지 않아 “결국 경찰 특수기동대가 40km나 차를 몰아 보트를 타고 섬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공군 헬리콥터조차 이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해 출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 기동대가 도착하자 브레이빅은 바로 체포됐다. 토르게르센 기자는 “브레이빅은 이미 150명에게 총을 쏘았고, 70명 이상을 죽인 상태였다. 부상자를 찾아내서는 마치 사형집행을 하듯 확인 사살을 했다. 브레이빅이 이미 총알이 떨어진 상태였다는 기존 보도와 달리 체포 당시에도 여전히 많은 총알을 갖고 있었는데, 450발 정도가 더 있었다”고 말했다.


오슬로 일간 다그블라데트에서 오피니언 섹션 부편집장을 맡고 있는 미칼 헴은 이 사건에 대해 “브레이빅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헴 부편집장은 “그는 살아서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데, 자신을 지하디스트를 막는 자로 여긴다”고 말했다.


헴 부편집장의 말을 요약하면 브레이빅은 고교시절까지 평범하게 자라다가 21살 정도에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바로 미국 9.11테러가 계기였다. 이후 브레이빅은 지난 9년간 노르웨이 정부, 즉 외국인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위 성전(지하드)에 대해 유연한 정책을 펴는 노동당에 대한 공격을 계획해 왔다는 것이다.


테러리즘에 대한 전문가인 루라스 박사는 “브레이빅은 매우 영리하고 단호했다”면서 “안보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미리 파악했다”고 말했다.


브레이빅이 작성한 1500쪽에 달하는 문건에는 이슬람과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는 자신의 의견을 적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테러를 계획하면서 모든 항목에 대해 치밀함을 보였다. 범행 전인 19일에 쓴 기록에는 “장비를 싸기 시작했다. 자동차마다 경유와 휘발유를 채워 넣었다. (폭발물) 퓨즈를 시험했다. 75cm 길이라 75초간 탈 것이다”라고 세세한 사항까지 썼다. 또 브레이빅은 지난 5월 2일 질소 비료로 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비료 6t을 구매했다.


그는 지난 4월에 임대한 한 작은 농장에서 지난 6월 경유와 비료를 섞어서 사전 시험까지 했다. 또 사건 5일 전에 미리 차를 렌트하고, 테러가 있던 날 마지막으로 글을 쓰고 오슬로로 향했다. 브레이빅은 이날 정치인들을 비롯해 공무원들이 여름휴가 때문에 보안이 느슨할 것이라고 미리 계산했던 것이다.


한편, 루라스 박사에 따르면 올초 오슬로 주재 미국대사관이 노르웨이의 테러 대비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오슬로 주재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대사관은 이 주장에 대해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


노르웨이 정부는 이번 비극을 계기로 지금까지 감시 체계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원유수출로 번 5800억 달러를 해외 펀드에 투자할 일이 아니라 자국민 보호를 위해 써야 한다.

 

 

글/ 제임스 오타르 그룬빅(James Ottar Grundvig)

※그룬빅은 노르웨이 출신 1세대 미국 이민자로 현재 뉴욕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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