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6일 토요일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마25:1-6)

언제부터인가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내게 무언가를 명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늘 부끄럽고 연약함을 느끼지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 하늘에 이루어 진 그 선하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그 부어 주시는 것은 어떤 메세지를 나누라는 것인데 막연한 감(感)만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시대에 나누어야 할 메세지를 제 영에 부어 주세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제가 순종하고 충성하겠습니다."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그것이 내 안에 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교회에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미 마지막 때의 중요한 코드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작은 충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재림에 대한 길을 예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부가 될 그리스도의 몸들이 신랑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어 있지 않음을 너무나 아파하셨습니다.
솔직히 나는 그것을 감지하고 한동안 기도를 깊이 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언어도 나누는데 부담이 있었는데, '재림'은 얼마나 더 할까?'
하는 생각이 제 심연 깊은 곳에 체기(滯氣)처럼 도사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재림에 대한 메세지를 집중하여 나눈다면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미 방언에 대한 것도 나누는데 적지 않은 순종이 필요했던 내게 이것은 더 큰 복종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이라면 '재림'에 대한 메세지는 자제할

것입니다.나도 그 명령을 받았지만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1:8-10)

나는 이 말씀을 읽다가 그 의미를 알고는 영혼이 전율하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란 말씀이 무척 서글프고도 아프게 영혼을 흔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라면 어떻하나?
성전의 문을...교회를 향한 하늘의 문을 닫으시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마저 엄습했습니다.
저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들을 성령님의 능력을 나눔으로 격려하고 응원하여
일으키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경고하고 때리는 것으로 정말 영혼이 변할까 하는 의구심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변방의 작은 곳에라도 찾아가 혼신으로 말씀을 나누고 부둥켜 안고 기도한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의미 부여가 그다지 없기에 선지자적인 메세지를 나누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지금 성령님이 붙들어 주시는 은혜의 시대 속을 살아 갑니다.
그야말로 '음부의 문'이 완전히 삼키지 못하는 '구원의 날'인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 문이 닫히고 성령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면, 여호와의 손이 우리를 놓으시면
엄청난 변질과 흑암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믿음과 신앙을 유지하고 있음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손을 놓아 버리면, 성전의 문을 닫으면 음부의 문이 교회를 향하여 열릴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환난의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전의 문을 닫을자가 있었면 좋으시겠다니요....
이것은 예레미야의 표현처럼 뼈와 심장이 떨리는 엄중한 말씀인 것입니다.
진정 깨어서 이 시대의 의미를 깊이 분별하고 절감하는 성숙한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우리는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 무언가를 추구하고 신앙의 형식으로 살아가지만, 그 중심과 진실을
정확히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는 어찌 보일까 항상 두려움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내 소견이지만) 절망입니다.


회피할 수 없이 이 두려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선택과 말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들 나름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의를 가졌습니다.(롬10:2,3).
그러나 주님이 오셨을 때에 그들은 언약의 진실로 부터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던 축복의 잔이 아니라, 시험하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깨트려 부순 것입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이토록 열심히 헌신하는데, 진정 그 문을 닫으시려 하시는가?'
한동안 명치 끝이 조여왔습니다.
몰른 이것은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나는 선지자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집사, 빌립처럼 사는 꿈을 가진 이라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게 '사역'이라는 말을 하면 사레를 치며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성경을 정확히 읽었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작정한 제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저도 성경이 말하는 그 기준에 너무나 떨어지는 형편없음에 날마다 깨어 있기를 갈망할 뿐입니다.
재림에 대하여 나누라는 말씀을 막연히 순종하기로 했지만 움직여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누어야 할 말씀을 구한 것입니다.
그 때, 처음 열어 주신 말씀이 이 예수님의 '열처녀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경남 진주의 시골 교회에 집회 요청을 받고 가던 길에 갑자기 열렸습니다.
차 안에서 기도하던 중에 불현듯 이 말씀을 떠올려 주셔서 나는 즉시 성경을 펼쳐서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정작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재림에 대하여 막연히 생각하던 나는 이 말씀을 읽는 동안 두려움과 충격마저 느꼈던 것입니다.
"열 명이 다 신랑을 기다렸는데...다섯명안 혼인 잔치에 들어 가다니..."
그전에도 이미 알았던 지식이지만...이것은 단순한 비유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심각한 영적인 생사의 문제였습니다.
그 날 저녁 진주의 한 시골교회 예배당을 가득 매운 그 땅의 성도들을 향해
처음으로 재림에 대한 메세지를 나누었습니다.
어디서인가 생각지도 못한 말씀들이 마구 연결되며 분출되어 나왔습니다.
그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듣고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경기도 오산의 한 공군 부대 집회에서도 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처녀들은 불신자들이 아니고 무슨 심각한 죄를 짓거나
함부로 산 이들도 아닙니다...그들은 모두가 다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등을 들었다는 것은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그런데도 그 중에 다섯명만 혼인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전하고 슬기로운 다섯처녀처럼 등에 여분의 기름을 예비(성령세례)하자고 전했습니다.
진주에서도 그랬고 부담이 컸던 공군부대의 집회에서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재림에 대하여 나누는 것이 두려움이나 비판받는 영역이 아니라 영혼을 일으키는

것임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을 통해서 열리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냥 재림에 대한 정보, 지식을 아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깨어 있게 하고 기름을 예비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등불이 비추어야 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25:1)

'등'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람파스'(lampas)인데 이스라엘에서는 '횃불'을 의미합니다.
옛날 한국적인 상황으로 번역해서 등이라 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횃불을 많이 사용합니다.
초막절에 대하여 탐구할 때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의 뜰에 엄청난 횃불을 밝혀서
어둠이 없는 빛으로 가득하게 했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성전인 우리의 영을 성령의 기름으로 밝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그 혼인잔치는 초막(장막)절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혼인 잔치는 들러리들이 횃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다 영접하여서 같이 횃불을 들고
잔치집에서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연회를 했다고 합니다.
횃불을 들지 못한 자나, 가졌어도 기름을 예비하지 않아서 계속 불을 밝히지 못한 자는
그 연회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어두운 그늘에서 그것을 부러워 하며 구경만 해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더욱 깊이 나누겠지만 이 등(횃불)을 들고 신랑(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
깊이 주목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횃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시119:105)

이 말씀이 그것입니다.
주님이 증거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진리의 영'(요14:16)이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요16:13)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대한 말씀을 열어 주시어 그것이 곧 우리의 걸음을

비추는 횃불이 되게 하십니다.또한 그것이 강력한 권능이 되게 하십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3:5)

성령님의 임재와 그 능력의 나타남은 오직 '믿음'인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에게 횃불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언약들...
그 날을 예비하고 깨어 있음에 대한 말씀들....
그것을 내 안에 부어진 기름부음, 성령님의 역사가 문자가 아닌 영으로, 빛으로 밝혀 주시면
진정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순종하여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는 그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 언약의 횃불이 내 영을 가득 채우고 이 어둔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합니다.
여기에 집중해야 합니다.재림에 대하여 막연히 생각하던 내게 성령님은 '열처녀의 비유'를

깨닫게 하심으로 횃불을 밝혀 주셨습니다.이 말씀이 내 성전의 내부를 밝히자 내 영이 더욱

깨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재림과 연결되지 않은 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말씀이 열리어 그것이 곧 주님의 재림에 가장 중요한 코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의 목적은 '재림'입니다.
역시 그 본질적 방향을 놓치면 자신이 하고 싶은 하나의 비전, 프로젝트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처녀의 비유를 하시기 전에 전에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인자가 곧 문앞에 이를 줄을 알라(마24:32-33)고 하셨습니다.
진정 이스라엘은 재림의 시금석입니다.
저는 이것에 집착하고 깊은 탐구를 했습니다.
무수한 동지들이 연결되었고 그 땅에 가서 댓가를 지불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작은 충성을 했습니다.
로마서9장에서 11장과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처음으로 종말과 재림의 때에 대하여 집중하게 된

말씀입니다.진실로 우리는 예수님의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게는 아직도 이 말씀이 그 발에 횃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지만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관심은 적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는 더욱 요원한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재림'에 대하여 말하지만 뜨거운 열망은 아닙니다.
'열처녀의 비유'는 재림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한 강한 메세지와 예비의 실제를
담고 있습니다.
재림에 대하여 인터넷이나 자료를 찾아 보니 대부분이 '휴거'의 시기나 '종말의 징조들'
'짐승의 표'등에 대한 것에 집중 되어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한 형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들어 간 적이 있는데 휴거가 '환난 전'인가

아니면 환난 후'에 일어나는가를 놓고 치열한 탐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토론에 참석한 이들은 제가 보기에도 성경만이 아니라, 신학 지식,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지식조차 갖추고 있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인터넷을 탐험하다 보면 평신도들 가운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탁월한 분들이 무척 많음을

봅니다.전 천년설과 후천년 설, 짐승의 표, 말세에 대한 예언등에 대한 것들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형제는 전 세계에서 마지막 때에 대하여 예언한 것들을 거의 다 찾아 번역해서 올리고

있었습니다.그런 것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마음 한 켠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그런 정보들은 예수님이 당장 눈 앞에 임하실 것만 같은 긴장을 주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집중하고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님...무엇을 나누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재림을 맞이하는 그 진정한 자세와 준비를 깨닫게 해 주세요."
날마다 간구할 때에 성령님께서 뜻밖에 '열처녀의 비유'를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것보다 그것에 집중하여 충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은 다른 이보다 먼저 내 삶에 횃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두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열방을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믿던 타나크(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는 대부분 그런 모습인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그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 헤롯과 로마의 폭압은 극에 달했기에 더욱 더 그들은 그런
정치적 제왕의 구세주를 갈망했습니다.
역시 유대인인 제자들이 계속 십자가를 지시려는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로막는 것도
그런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눅19:11)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즉시 왕이 되시고
그들이 바라던 그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가랴의 언약대로 감람산 벳바게(무화과 마을 이란 뜻)를 지날 때에 백성들이 종려나무와

겉옷을 바닥에 깔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칠 때는 정말 곧 그 날이 올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이 세상을, 이 악하고 흑암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꾸고 열방을 다스릴 것이라

믿었습니다.그들에게 주님은 '열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그 나라는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왕권'(王權)을 받으러 먼 나라(천국)에 가서
'왕위'를 받아서 다시 올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자들과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이 그 밭에 심기워 지지 못했고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듣기는 들어도 그것이 영으로 깨달아져 그 길을 따르게 하는 횃불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조차 믿음을 상실하고 환난 가운데 주님을 부인하여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우는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것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두가지의 형태로 계시되어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는 보이지 않게 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이루어

졌고 지금도 우리가 성령의 권능과 침노를 통해 들어 가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보이지 않게 임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8)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천국(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그러므로 드러나는 형태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악한 권세를 깨트리는 그 일(마12:28)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연구하며 '겨자씨'와 '누룩'등에 나타난 '지극히 작은

것'을 통해 번져가는 보이지 않는 그 나라와 확장에 깊이 몰두하였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들을 회복하는 그 일에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조직이나 사람을 의식하는 것, 세상에 주목을 받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두 세사람이 진정성으로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거기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에 그것 만으로도 충일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눈을 뜨면서 천국에 대하여 또 하나의 비유를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유대인들처럼 한가지의 편향된 안목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어린 양 예수님이 열으신 그 나라를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갈망했던 그 관점은 완전하지 않아도 사실 재림하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일부분이지만 그것도 분명히 성경이 계시하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은 만왕의 왕으로 오실, 열방을 다스릴 왕위를 가지고 오실 메시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초림하신 예수님이 이루신 보이지 않는 그 나라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보이는 형태로 드러날 이 땅에 임할 그 나라에 대하여 이해와 개념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닙니다.
이 지식의 부재가 지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할 교회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런데 마지막 때의 중요한 코드로서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땅에 임할

그 나라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아닉 쥬'들은 여전히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재림하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요 현실적으로 그 땅에 오시는 메시아입니다.
그리고 열방을 다스리십니다.
그들은 그것이 자연스럽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임하실 그 나라만 집착하던 제게는 너무나 그 개념이 익숙치가

않아서 처음엔 낯설고 부담이 컸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일어나 공중으로 들려 올려질 휴거에 집중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혼인잔치를 하는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이 세상은 곧 심판을 받고 불에 타서 버림을 받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로 태워서 없애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이 땅으로 내려 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태초의 에덴의 풍경과 영적인 충만함으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만져지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처럼 제게 천국은 죽으면 가는 저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그것을 너무나 사모해서 천국에 대한 책들을 한동안 많이 읽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는 천국은 그것입니다.
여전히 그곳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경륜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엡1:10)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지향해야 할 최종적인 'One New Man'입니다.
이 비전의 등불이 우리 안에 가득차려면, 먼저 가장 작은 것에서 부터 내 안에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천국 이해는 거의 막연한 영적인 개념입니다.
물론 그것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교회가 유대인들과 그 땅을 떠나 서방으로 가면서
헬라철학의 영향가운데 들어가면서 확장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연구를 깊게한 랜디 알콘의 <헤븐,Heaven>이라는 책을 읽으시면 도움이될

것입니다.)이스라엘은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로 인해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더욱

연결하는 고리입니다.그 후에 성경을 깊이 탐구하면서 그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 나라는 이제 이 땅에서 이루어 집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읽었으면서도 막상 이 땅에서 이루어질 그 천국은 제게 너무나 낯설고 회피

하고 싶은 무엇이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떠나서 저 하늘의 아버지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집에 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다시 이 땅이라니요?물론 그곳은 새롭게 변화된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은 낯설기만 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이 마지막 때에 대한 비유에 나오는 '천국'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그 나라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 그 천국에 들어가는 가를 아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전 천년설, 후천년설, 휴거의 때와 짐승의 표에 대하여 아는 것보다 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슬기로운 처녀의 진정성을 깨닫고 그 삶을 소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이 영적 실제가 없으면 그 어떤 지식과 열심을 가졌어도 그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등을 소유했어도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면 어두움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비유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다른 말씀들을 비교하며 그저 상징적인 것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심각한 말씀입니다.그저 막연히 살아갈 시절이 아닙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119:55,56)



<출처= 김우현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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