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단두대의 역사

단두대의 역사








루이제뜨, 쁘띠 루이종. 참 예쁜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길로틴에 붙었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단두대를 뜻하는 길로틴은 흔히 아는 바와 같이 의사였던 기요탱 박사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길로틴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파리대학의 해부학 교수이자 의사이며 정치가였던 조제프 기요탱(길로틴은 독일식 발음이고, 프랑스 발음으로는 기요탱이 된다) 박사는 죄수를 처형하는 방법으로서 길로틴을 제안했던 사람에 불과했다.


사실 기요탱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보다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무시무시한 의도에서 개발된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인도주의적이고, 프랑스대혁명의 혁명정신에도 걸맞는 형벌에 있어서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그야말로 형벌에 있어서도 혁명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흔히 생각하기에는 사람의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이 더 잔인하게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목을 베는 것은 가장 적은 고통으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깔끔하게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처형방법이었다. 그래서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단두형은 오로지 귀족만의 품위 있게 처형될 수 있도록 하는 전유물이었다. 귀족 이외의 평민들에 대해서는 단두형이 아닌 보다 오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교수형만이 허락되었다. 지금을 기준으로 본다면야 말이 안 된다 하겠지만 워낙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단숨에 목을 잘라 죽이는 것도 인도주의였고, 귀족들처럼 목을 잘라 죽이자는 것도 평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너무나도 역설적이라 얼핏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숭고한 신념은 마침내 혁명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져 앙트완느 루이에게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사양에 맞는 장치를 개발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길로틴 혹은 기요틴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처음 쓰인 것이 아마 공포정치가 한창이던 1792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도구 가운데 가장 인간을 위해 쓰였다고 하는 이 역사적인 단두대의 이름으로 주창자였던 기요탱 박사의 이름이 붙여졌다. 기요틴, 길로틴 등은 길로틴을 쓰던 나라에서 각자 읽는 방법의 차이로 다르게 불리던 이름들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길로틴은 프랑스대혁명 당시 처음으로 개발되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13세기부터 독일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이탈리아 등지에서 초기적인 형태의 단두대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에도 이와 비슷한 도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확인을 못 해봤다. 아무튼 16세기 그려진 그림에도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모습이 있었다 하니 단지 길로틴은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개량되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 의미나 결과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처음 의도는 이렇게 좋았는데 정작 기요탱 박사는 자신이 길로틴의 사용을 주장했던 것을 평생을 두고 후회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혁명정부 자신이 길로틴의 사용을 받아들인 자체가 기요탱 박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포정치로 인해 어느새 4만 명까지 늘어난 사형수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한꺼번에 대량으로 처형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였기 때문이었다. 엄정하고 정의로운 법집행으로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 제안이 도리어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손쉽게 끊는 수단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있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시 "가장 순수한 감정은 공포"라며 프랑스에 혁명정신을 더욱 깊숙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라도 공포로서 기존의 구시대의 잔재를 일소하려고 했던 로베스 피에르와 자코뱅에 있어 길로틴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그외 아직 국외로 몸을 피하지 못한 귀족들이 차례로 길로틴에서 목이 잘렸고, 그 뒤로는 혁명에 소극적이거나 혁명정부에 비판적이던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뒤를 이었다. 수 만 명이 그렇게 혁명을 위해, 지극히 고결하고 지극히 정의로운 로베스 피에르의 혁명을 위해 길로틴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작은 선의에 의한 것이었어도 결과까지 선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기요탱 박사의 머리가 어느새 하얗게 새어 버렸다고까지 전해진다. 물론 과연 그것이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것인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자연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얗게 새어버렸다는 자체가 과장된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스스로 일생일대의 치욕이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 괴로워했다는 증언으로 보아 그 충격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와는 달리 기요탱 박사 자신이 길로틴에 목숨을 잃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로 인해 평생을 후회와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다. 아니 지금도 그의 이름은 무시무시한 살인도구의 이름으로서 기억되고 있으니 살아서는 물론이고 아마도 영원히 그는 자신의 행위로 인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혁명을 위해, 혁명정부를 위해, 궁극적으로는 자코뱅과 로베스 피에르 자신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끊었던 길로틴은 끝내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에 염증을 느껴 그리고 자신도 언제 저리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에 반대파가 들고 일어나 그들을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공포정치의 마지막을 로베스 피에르 자신과 그 추종자의 피로서 장식하게 된다. 자업자득이랄까? 하지만 그 이후 혁명정신이 퇴보한 것을 보면 무언가 아쉽기도 하고.

프랑스대혁명 이후로도 혁명정신과 함께 길로틴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어 처형의 수단으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심지어 길로틴으로 처형하는 장면은 별다른 오락이 없던 그 시대 아주 훌륭한 구경거리이기도 했는데 길로틴 처형이 있는 날이면 처형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심지어 1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까지도 처형하는 장면을 구경하곤 했었다. 처형이 조금이라도 늦춰지면 고함을 질러 재촉하기도 하고, 사형을 당하는 범죄자를 비난하고 저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처형된 범죄자들의 신체의 일부는 부적으로 의약품으로 이리저리 팔려가고 남은 머리는 장대에 꽂혀 사람들에게 전시되었다. 그러한 공개처형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이 프랑스 그것도 1939년이었으니 이러한 야만적인 모습들이 아주 최근까지도 근대화된 유럽사회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길로틴을 사용한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것이 1977년. 그로부터 4년 뒤에 비로소 프랑스에서는 사형제가 완전히 폐지된다. 1792년부터 장장 185년을 사형을 집행하는 도구로서 쓰인 셈인데 길로틴을 처음 만들고 사용하기도 마지막으로 사용한 프랑스에서 이제는 다른 나라더러 사형제를 야만적이라 폐지하라며 권유라는 입장이 되어 있으니 하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기요탱 박사가 바라던 바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인도적인 사형은 사형을 않는 것일 터이니…


http://blog.naver.com/smilesunkr/120063772086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