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태평양 눈돌린 미국 "중국, 무릎 꿇어!"

ⓒAP Photo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1월12일 하와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국이 한국이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환태평양 국가들로 건너가 성채를 쌓으려 한다. 이 성채에는 어떤 나라든 들어올 수 있다. 미국으로서는, 많이 올수록 좋다. 단, 중국만은 안 된다. 중국은 미국이 구축할 '천하 질서'에 무릎 꿇은 다음에야 입장이 허용될 것이다. 다만,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라는 이 성채를 짓기 위한 건축 허가를 먼저 받아내야 한다. 이 허가증의 이름은 한ㆍ미 FTA이다.

TPP는 미국과 태평양을 둘러싼 8개국(베트남ㆍ오스트레일리아ㆍ뉴질랜드ㆍ브루나이ㆍ말레이시아ㆍ칠레ㆍ페루ㆍ싱가포르)이 창설하기로 한 자유무역지대다. 11월12일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가장 주목받은 행사 역시 정상회의가 아니라 TPP 협상이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내년 말까지 협상을 완료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더욱이 APEC 직전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TPP 참여 선언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보다 더 광대한 자유무역지대의 출현이 예고되었다. 이에 더해 미국은 캐나다ㆍ멕시코는 물론 한국에도 TPP 참여를 촉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은 불만이다. 중국 상무부의 위젠화 차관보는 "중국은 어떤 나라로부터도 TPP에 초대받지 못했다"라고 분개했다. 런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TPP는 모든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중국은 초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라고 유들유들하게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TPP에 들어오려면) 중국의 경제체제를 바꿔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발언이야말로 미국의 속내다. TPP를 통한 중국의 화평연변(和平演邊:비폭력적 방식으로 체제 변화를 유도)이 그것이다. 사실 미국이 아시아 국가의 '화평연변'을 유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적어도 이 부문에서 일본(1980~1990년대)과 한국(1997년 이후부터)은 중국에 앞서 평화롭지만 과격한 체제 변혁을 경험했다.

미국의 '혁명 수출', 중국 노린다

그런데 미국은 왜 다른 나라의 화평연변을 바라고 유도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미국의 주력 산업인 금융 부문에 이롭도록 세계를 조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ㆍ경제 시스템의 핵심은 '돈 가진 자'(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개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 경영의 목표는 '주가(=기업가치) 상승'으로 수렴된다. 고용이나 매출 확대, R&D를 비롯한 장기 투자(비교적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수익을 회수할 수 있는) 등은 후순위 목표다. 이 시스템에서는 기업의 상품을 팔기보다 '기업 그 자체'(기업 경영권)를 주식시장에서 사고파는 것이 수익성 높은 산업이다. 기업의 주식 지분을 대량 매입해 경영권을 얻은(인수한) 다음 구조조정으로 기업 가치를 높여 되파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거래는 모두 주식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니 당연히 자본시장(주식ㆍ채권 시장)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역으로 자본시장의 규모가 클 때 투자자의 수익 기회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할 수 있다. 투자자가 공공정책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생각할 때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벌일 수 있는 투자자ㆍ국가 소송제(ISD)는 이 시스템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미국 같은 헤게모니 국가에서 이런 '수지맞는' 장사를 미국 내에서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 기업(주식)도 사고팔 수 있어야 더 큰 수익이 보장되지 않겠는가. 문제는 동아시아 등 상당수 나라의 경우, '기업 그 자체의 거래'가 법률ㆍ관행 등으로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까지 해당국 기업(주식)을 자유롭게 거래(자본시장 자유화 및 개방)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각종 수단을 통해 관철했다. 일종의 '혁명 수출'인데, 동아시아 3국 중 이런 흐름에 가장 먼저 휩쓸린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은 미국의 압력으로 엔화 가치를 고작 6개월 동안 달러 대비 40%나 높였다(플라자 합의). 이어서 실질금리를 사실상 0%로 내린 것도 미국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자금이 주식ㆍ부동산 시장으로 몰려 자산 거품이 형성되었다가 1990년 초 폭발하면서 장기 디플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러나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일본의 경기 침체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1993년엔 금융 시스템 개혁을 요구한다.

이 개혁의 핵심은 '주식시장 육성'인데 이는 사실상 일본 특유의 기업ㆍ은행 간 친밀한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기업과 은행이 상대방의 주식을 다수 보유했다. 이는 주가가 오를 때 팔아 큰 수익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를 튼실하게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리스크를 싫어하는 시민들은 주식 투자보다 은행 예금을 선호했고, 이렇게 은행에 축적된 돈은 기업의 장기 투자 자금으로 흘러갔다. 일본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주식 투자를 꺼리는 데다 기업과 은행이 엄청난 양의 주식을 쥐고 시장에는 내놓지 않으니 자본시장의 규모가 커질 리 만무했다. 1996년 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총리는 클린턴의 권고(?)에 따라 '자유ㆍ공정ㆍ지구화'라는 슬로건 아래 '금융 빅뱅'을 단행한다. 자본시장을 키우기 위해 각종 혜택과 규제 철폐를 통해 서민이 여유자금을 은행보다 주식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조처였다. 이는 가계→은행→기업으로 흐르던 자금순환 경로를 끊어 일본의 경제 시스템을 일거에 바꾸려는 대담한 계획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혁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현재 일본 경제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일본 TPP 참여 선결 조건, '우정국 개혁'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일본에 강력히 요구한 일본 우정국 민영화도 '금융 빅뱅'과 마찬가지다. 일본 우정국은 우편배달 시스템인 동시에 초대형 저축ㆍ보험기관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국유 금융기관이라 할 수 있는 우정국에 1% 이하의 초저금리에도 돈을 맡겼다. 이에 따라 우정국이 운용하는 자산은 무려 3조 달러가 넘었다. 세계 최대 민간 금융기관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의 자산 규모가 1조5000억 달러에 불과하다.

이 돈을 운용한 주체는 일본 정부였다. 주로 공공사업에 사용했다. 결국 우정국 민영화 역시 우편 시스템이 아니라 일본의 경제체제를 바꾸라는 요구였다. 3조 달러의 운영을 정부가 아니라 민간 금융기관에 맡기라는 얘기였다. 더욱이 민영화 주체로는 미국 금융기관이 나설 것이었다. 우정국 민영화는 2005년 말 고이즈미 당시 총리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물살을 타는 듯했으나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백지화 위기에 처했다. 미국이 일본의 TPP 참여에 대한 선결 조건으로 '우정국 저축 및 보험 시스템 개혁'을 다시 내건 것은 이 때문일 터이다.

미국이 '한국의 화평연변'을 시도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서였다.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하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자본시장 자유화 및 개방'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대기업 주식을 취득할 때 적용되던 여러 규제를 폐지하고(자유화), 외국인의 국내 주식 소유한도를 철폐했다(개방). 또한 적대적 인수합병(M&A)까지 허용함으로써 한국은 미국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AP Photo 중국 증시에는 1800여 개 국내외 기업이 상장되어 있지만, ‘기업 거래’는 이뤄지지 않는다. 위는 2001년 1월 상하이 증권거래소에서 직원들이 근무하는 모습.

지금까지 보았듯이 미국은 개별적 압력으로 일본을 변화시켰다. 한국은 국제기구(IMF)의 힘을 빌려 경제 시스템을 바꾸었다. 그리고 중국은 TPP를 통해 변화시키려 한다.

미국에게 중국은 대단히 뻔뻔스러운 나라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당시 중국은 금융ㆍ자본 시장 개방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행 실적은 대단히 불량하다. 중국 증시에는 1800여 개에 달하는 국내외 기업이 상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장은 있지만, 그 핵심적 기능인 '기업 그 자체의 거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나온 주식을 아무리 매집해봐야 해당 기업의 경영권을 획득할 수는 없다.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주요 기업의 소유권(주식 중 절대 지분)을 쥐고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 정부가 기업 경영권은 물론 금리와 환율까지 통제하면서, 해외 자본이 자국 금융시장에서 재미 볼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교역 국가 모두 포괄하는 '중국 고립 작전'

이런 상황에서도(혹은 이런 상황 때문에!),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배력을 계속 강화해왔다. 한국을 포함한 지역 내 국가들의 무역 실적에서 중국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 중국은 WTO 가입 이후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경제 세력권을 급속히 넓혀왔다. 동남쪽으로 아세안(ASEAN), 태평양 너머 칠레와는 이미 FTA를 비준했다. 오스트레일리아ㆍ뉴질랜드와도 FTA 협상을 진행 중이다. 동쪽으로는 한국과 일본에 FTA를 제안했다. 다만 중국의 FTA는 상품 무역에 국한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ㆍ뉴질랜드와는 서비스ㆍ투자 부문까지 협상 대상에 넣긴 했지만, 이 나라들 역시 ISD나 지적재산권까지 포함시키는 데에는 부정적이다. 중국과 FTA를 체결했어도 그 수위가 높지는 않으리라는 이야기다.

이런 중국의 자본시장을 어떻게 열어젖힐 것인가. 지금까지 미국의 해법은 '위안화 절상' 공세였다. 수출에 목매고 있는 중국 처지에서 위안화의 급격한 절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다. 더욱이 중국은 일본이 엔화를 절상했다가 어떤 곤경에 빠졌는지도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미국으로서는 '위안화 절상'을 내걸고 중국을 위협하면서 자본시장 부문에서 타협점을 찾아내려 했지만 그간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그러므로 2009년 미국이 TPP 논의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 대한 책략'을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주요 교역 국가를 모두 TPP로 포괄해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작전이다. 중국이 FTA를 이미 체결한 아세안 4개국과 칠레, FTA 협상 중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일본 등이 TPP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한ㆍ미 FTA도 비준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TPP는 개방형 협상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수 국가를 포괄할 수 있다. 타이,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의 다른 나라도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출 기반 경제인 중국으로서는 TPP에 들어가는 것 외에 길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TPP에 들어가려면 중국이 강도 높은 체제 개혁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목표로 하는 TPP의 틀은 한ㆍ미 FTA보다 한층 더 강한 자유화와 '투자자 보호' 조항을 담을 가능성이 크다(19쪽 상자 기사 참조). 오바마 대통령은 TPP를 "21세기형 무역협정으로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11월9일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보고서는 "TPP 회원국들이 만드는 규범과 시스템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즉 미국은 TPP를 자국의 이익에 적합한 '글로벌 게임 규칙'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이런 계획이 어느 정도 추진되기 전까지는 중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TPP에 자국의 주장을 관철시키며 회원국을 늘리는 데 성공한다면, 중국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TPP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지만, 쾌히 들어갈 수도 없다. 중국 내 대기업에 대한 공산당의 소유 독점을 크게 완화하거나 폐기해야 할 뿐 아니라 금리ㆍ환율 등에 대한 통제권도 크게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화평연변이다. 중국은 지금 외통수로 몰리고 있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308&aid=0000005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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