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3일 화요일

공산주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명의 유대인이 있다. 예수와 카를 마르크스(사진)다. 2005년 영국 공영방송 BBC는 설문조사를 통해 마르크스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선정했다. 철학자·사상가이자 경제·역사학자로 19세기 중반 공산주의란 새로운 이념과 사상 체계를 창시한 인물이다. 마르크스는 유럽의 오랜 구체제를 과학적 사회주의혁명으로 개조한다는 급진적 이론을 내놓았다. 그의 이론은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계승되고 이후 공산주의는 70여 년간 맥을 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금기였다. 한국전쟁 이후 멸공·승공·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한국에선 일개 경제학 서적에 지나지 않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마저도 한동안 금서였다. 90년대 중반 이후에야 국내 마르크스 연구가 정치·경제 담론의 주제로 발전했다.

학창 시절 괴테·베토벤 좋아한 낭만주의자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프로이센 지역인 라인란트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유대교 목회자인 랍비 가계다. 외가도 네덜란드 랍비 집안이다. 변호사인 그의 부친은 루터교로 개종했다. 가문의 성(姓)인 모르데카이는 마르쿠스(Markus)에 이어 마르크스(Marx)로 바꿨다. 유대인 혈통의 마르크스는 유대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으며 차차 종교를 혐오하게 됐다.

학창 시절 마르크스는 괴테·셰익스피어·뒤마의 문학과 베토벤을 좋아한 낭만주의자였다. 본 법대를 다니긴 했지만 문학·역사·철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으로 옮겨 당대 독일 최고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혁명론에 심취했다. 다만 헤겔 좌파에 속한 그는 헤겔의 관념론에 대해 해석을 달리했다. 즉 정신적 상황이 물질을 결정한다는 헤겔의 학설을 물질이 정신적 상황을 결정한다고 반대로 해석했다. 유물론의 태동이다. 이 시기부터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이 현세에 겪는 고통을 내세의 환상으로 도피시키려는 민중의 아편”으로 폄하했다.

1841년 에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마르크스는 반프로이센 체제 성향의 신문을 창간하고 기자와 주필로 활동했다. 그는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파리로 이주해 프랑스 급진 사회주의의 태두인 오귀스트 블랑키와 어울렸다. 혁명가로 변신한 마르크스는 파리 한 카페에서 그의 평생 지기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났다. 마르크스는 파리 시절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본산인 ‘대 동방종단’에도 입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1845년 프랑스는 그를 기피 인물로 추방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2년 체류하다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후 엥겔스와 공저로 많은 책을 저술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시작으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그리고 자본론을 집필했다. 1867년 제1권이 출간된 자본론의 2,3권은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완성시켰다. 4권 잉여가치 학설사는 카를 카우츠키가 편집·출간했다.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인 ‘제1 인터내셔널’의 창설과 더불어 마르크스는 유럽 사회주의혁명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과의 주도권 경쟁도 있었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1871년 3월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투쟁인 ‘파리 코뮌’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두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마르크스는 공산혁명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말년에 영국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던 마르크스는 1883년 기관지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추종자들은 유럽 각지에서 공산혁명을 도모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생전에 마르크스는 공산혁명이 서유럽에서 성공하는 것은 시기상조임을 깨닫고 대신 러시아를 혁명의 최적지로 보았다. 마르크스 이념의 추종자인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 등은 1917년 러시아의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다. 초기 혁명 주역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일루미나티 계열 비밀결사 단원이었다. 레닌은 외가가 유대 혈통이고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유대인이다.

공산주의 붕괴시킨 자본주의도 시험대에
이후 공산주의는 세계로 확산돼 동서 냉전기 45년간 세계를 호령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각종 변형된 형태로 나타났다.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수정사회주의 등으로 변질돼 피지배층을 고통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과 동족상잔이 자행됐다. 종교를 부정한 공산주의는 종교를 대신했다. 각국의 공산독재자는 현세의 메시아를 자처했다. 계급타파 투쟁은 새로운 공산당 귀족을 탄생시켰다. 인민의 낙원은 인민의 지옥으로 변했다. 인민의 삶을 도외시하고 자본주의 진영과 소모적인 경쟁만 일삼다 기력이 쇠진한 공산진영은 80년대 초부터 체제의 한계를 드러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무력대결 없이 공산권을 안락사시켰다. 많은 옛 공산권 국가들이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했다. 마르크스의 혁명론은 90년대 초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공산체제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자멸했다. 승리에 도취된 자유진영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야말로 지고의 가치라고 자만했다. 그러나 공산권 붕괴 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세계는 새로운 난제에 직면했다. 세계 도처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는 해소불능 수준으로 확대됐다. 자본가의 탐욕도 도를 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시장체제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한동안 용도 폐기됐던 마르크스의 경제이론도 재조명되고 있다.     

박재선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4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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