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7일 수요일

'아토믹 솔저'와 헐리우드 스타들

1945년 7월 16일 새벽, 미국 뉴멕시코주 모래사막 한 가운데서 엄청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습니다. 암호명 ‘트리니티’, 즉 ‘삼위일체’로 불린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지던 순간이었죠. 16Km 떨어진 관측소에서 이 폭발을 지켜보던 과학자들은 넋을 잃고 거대한 버섯구름을 쳐다보았습니다. 이 버섯구름은 12km 상공까지 솟아올라갔다고 하는데요, 당시 미국의 원폭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이 광경을 보고 고대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나는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다”라는 시구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발된 원자폭탄은 다 아시다시피 곧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고, 일본의 패망을 불러왔습니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렸던 것은 1945년부터 약 4년간이었죠. 하지만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소련은 미국의 원폭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를 포섭해 핵심기술을 빼냈고,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사막지대에서 마침내 원폭실험에 성공합니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독점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핵개발로 대표되는 냉전시대 군비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죠. 핵무기는 이후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됩니다. 영국과 프랑스, 중국이 잇달아 핵실험에 성공하고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됩니다. 동서 양 진영의 경쟁적 핵개발로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든 결국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 냉전시대 내내 위태롭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핵무기 개발에는 필연적으로 핵실험이 뒤따랐는데요, 그 실험장이 된 곳이 바로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미국 서부의 사막지대, 소련의 중앙아시아와 북극해 지역,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지역 등 이었습니다. 이 무렵 핵실험 장면을 찍은 미국과 소련 사진이나 기록필름에는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걸어가거나, 아무런 보호장구 없이 핵실험을 관측하는 군인이나 기술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1975년, 네바다 핵실험에 참가했던 미 육군 출신 ‘폴 쿠퍼’는 자신이 백혈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죠. 그는 자신이 걸린 병의 원인을 추적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되는데요, 바로 50~60년대 핵실험에 참가한 퇴역 군인들이 유독 백혈병이나 암에 많이 걸렸음을 알게 된 것이죠. 미국은 1946년부터 63년까지 대기권 핵실험을 포함한 235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방사선에 노출된 군인과 민간인이 25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폴 쿠퍼의 폭로를 계기로 미국 언론들은 이들 피해자들을 ‘아토믹솔저’ (Atomic Soldier)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토믹 솔저들에 대한 기록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은데요, 연방 해체이후 구 소련의 사례들은 꽤 알려지고 있는 편입니다.






냉전시기 구 소련은 모두 715회의 핵실험을 하였는데, 쿠바 위기가 발생했던 1962년과 그 이전해인 1961년 2년 동안에는 무려 138회의 핵실험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핵실험이 실시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소련 당국은 핵실험으로 인한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1954년 9월 14일에 실시된 오렌부르그 주의 토츠크시 지역에서는 핵무기를 공중에서 폭발시키면서 같은 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기까지 했는데요, 핵실험에 관여한 군인들에게는 방사능의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인으로 핵실험에 동원되었던 ‘미하일 로키츠키’의 증언은 충격적입니다. 그가 속한 대대는 1956년 여름에 북극해 노바야젬랴의 초르나야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이 섬에 소나 양, 닭 등 가축들이 운반되어 오더니, 해안에는 퇴역한 낡은 군함들이 정박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를 포함한 군인들에게 군함에 타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일주일 동안 바다위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둔지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놀라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고, 새까맣게 탄 짐승의 사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던 것이죠. 해안에 정박해 있던 낡은 군함들도 다 타서 철골구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키츠키가 속한 대대원들에게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잔해를 치우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부대원들이 하루 작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불태웠고, 다음 날에는 다시 새 군복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두 달의 시간이 흘러갔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군인들의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빠지는가하면, 로키츠키 자신도 왠지 온 몸에 힘이 없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제대하면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서약을 했던 로키츠키는 그 후 여러 가지 병마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 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가를 안 것은 구 소련이 해체되고도 한참 뒤인 1996년 이었습니다. 소련 군부가 노바야젬랴의 핵실험에서 핵폭발이 인체와 동물 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실험했다는 것이 공개된 다음이었죠. 아울러 500여명에 이르던 자신의 대대원들 중에서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사람은 그를 포함하여 12명밖에 안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카자흐스탄 사막의 ‘세미팔라틴스크’ 지역은 1949년부터 40년 동안무려 467회의 핵실험이 실시된 곳으로 이곳의 사례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당시 이 핵 실험장 주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은 마치 불꽃놀이를 보듯 핵실험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소련 당국은 주민들에게 절대 위험한 것이 아니니 겁내지 말라고 했고, 이 말을 믿은 주민들은 핵폭발 실험이 있을 때마다 구경을 나갔다고 하는군요. 정확한 통계를 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 기간 동안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들은 24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곳에 사는 여성 세 명당 한 명꼴로 염색체 이상이 나타나고 있고,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의 숫자가 10만 명 당 1천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상보다 수십 배나 높은 수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주민들이 각종 암과 백혈병 등으로 죽어갔고, 선천성 정신질환자들과 기형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죠. 핵실험이 중단된 지금도 이곳의 땅과 지하수, 공기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고, 방사능 수치는 정상보다 수십 배나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구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의 푸틴 대통령은 2002년 1월, 이 지역에서 있었던 핵실험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조치를 규정한 법을 공포했는데요, 억울하게 죽었거나 기형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안 되겠지요.










가장 미국적인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던 '존 웨인' (1907~1979)


그런데 이런 고통은 소련 사람들만 겪었던 것은 아니었는데요, 서두에 말씀드린 미국의 경우는 좀 더 극적으로 나타났지요. 바로 ‘존 웨인’과 ‘수잔 헤이워드’, ‘페드로 알멘다리스’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죽음에 관한 수수께끼입니다. 1954년 미국 유타주의 사막 ‘스노우 케니언’ 에서는 징기즈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정복자’의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딕 파우엘’이 맡고 있었고, 징기즈칸 역에는 존 웨인이, 여주인공 역은 수잔 에이워드가 열연하고 있었죠. 또 감독과 배우들을 비롯한 스태프 220여명과 몽고족으로 출연했던 아메리카 원주민 300여 명이 동원되었죠.

영화는 석 달 동안 이곳 사막에서 촬영되었고, 1956년 2월 개봉됩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영화의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가장 먼저 불행을 맞은 것은 감독 ‘딕 파우엘’이었습니다. 그는 1963년 임파선과 폐에 생긴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직후에는 이 영화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던 ‘페드로 알멘다리스’가 임파선 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나서 권총으로 자살하죠. 같은 시기 존 웨인도 폐암으로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두 차례 받습니다. 존 웨인은 이 후에도 위와 담낭, 장에 생긴 종양 때문에 고생하다가 결국 1979년 6월 장암으로 사망합니다.










영화 정복자의 포스터.

극중에서 존 웨인을 사랑하는 타타르족 공주로 출연했던 ‘수잔 헤이워드’ 역시 피부암, 유방암, 자궁암이 발생한데 이어 1975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죠. 그런데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한 부위에서 암을 깨끗이 제거해도 다시 재발한다는 점이었는데요,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당시 영화 ‘정복자’ 촬영에 관계했던 배우와 스태프 22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암이나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이죠. 또 영화 촬영 기간에만 이곳에 머물렀던 스태프들과는 달리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시브위트’족 원주민들은 이곳 주변에서 대대로 삶을 이어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00여명의 원주민들은 거의 대부분이 각종 암에 걸려 고통을 받다가 죽어갔는데, 이들 부족이 거의 전멸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 영화가 촬영된 유타주 ‘스노우 캐니언’은 그때까지 한 번도 카메라가 들어간 적이 없는 불모지였다고 합니다. 영화 스타와 스태프들에게 생긴 암의 비밀은 버로 이곳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은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핵실험이 실시되었던 네바다 실험장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네바다 핵실험장은 인구 밀집지역인 캘리포니아주와 라스베가스와 남서쪽으로 인접해 있었는데요, 그때문에 이 곳에서의 핵실험은 바람이 이들 도시의 반대편으로 불어 올 때만 행해졌습니다. 즉 풍향이 인구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유타주 사막 쪽으로 불 때에 핵실험이 실시되었던 것이죠.




정복자가 촬영된 유타주 '스노우 캐니언'.





1951년부터 58년까지 네바다에서는 모두 97회의 대기 중 핵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이때 발생했던 ‘죽음의 재’라고 불리는 낙진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로키 산맥에 가로막혀 유타주의 사막 지대에 내려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를 찍었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몽골의 초원지대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촬영을 진행했던 것이죠. 주목할 만 한 점은 영화가 촬영된 1954년은 네바다에서 단 한차례의 핵실험도 없었던 해인데요, 이 점을 보더라도 핵의 공포가 얼마나 끔찍스러운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복자’ 말고도 당시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었던 많은 서부극들의 로케이션 장소가 바로 유타주 사막이었다는 점에서, 이들 영화에 출연했던 ‘게리 쿠퍼’나 ‘마이클 커티스’, ‘헨리 폰다’, ‘존 크로포드’ 등 암으로 생을 마감했던 많은 스타들의 죽음이 핵실험과 직접 관련 있다고 환경운동가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냉전시기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서운 핵무기의 공포가 할리우드 스타들의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전해지고 있는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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