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지도자 존 후쓰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지도자 존 후쓰
 
존 후쓰(John Huss,1369-1415) 는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방인
보헤미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환경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에게 최상의 교육을 해 주었다.
사립학교에서 고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후 그는 프래그의 대학에서 지적
능력을 쌓았다.
보헤미아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돌아오면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써 보헤미아 지방의 '프라하 대학교'(University of Prague)에서는
위클리프의 작품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 당시 후쓰는 프라하대학 철학교수로 있으면서 '베들레헴'(Bethlehem)성당의 설교자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 무렵 후쓰는 당시 종교회의주의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정도의 교회 개혁을 주장했으나 교회의 전통적 교리에
도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위클리프의 작품이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위클리프의 철학을 놓고 프라하 대학 안에서 독일인들은 위클리프 사상이 고루하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이었고
체코인들은 그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이같은 견해 차이는 드디어 국왕이 보헤미아 편을 듦으로써 독일인 학생들은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찌히'(Leipzig)에
자기들 대학을 설립한다.
1398년에 후쓰는 신학사(B.D.) 과정을 시작했으며, 후에 프래그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목사로, 대학 총장으로
지정되었다.
그 일을 그는 성실하게 수행했으며 마침내 설교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위클리프의 교리와 일치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주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쓰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들을 맹렬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개혁주의자인 위클리프가 개혁에 불을 붙여서 교황권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무지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교리는 보헤미아까지 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였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존 후쓰와 그의 열성적인 친구이며 동료 순교자인 프래그의 제롬이다.
그런데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찌히롤 간 독일인들은 보헤미아 사람들은 위클리프를 동조하는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떠들어댔다.
개혁주의자들이 날마다 증가하는 것을 보고 프래그의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확산되지 못하게 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위클리프의 교리를 강력하게 수호했던 후스는 대주교의 칙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교황의 교서를 얻어내었고, 그 지역에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후스 박사는 대학의 몇몇 다른사람들과 함께 이런 절차에 항거했고 대주교의 판결에 항소하게 되었다.
이 대주교는 교황으로 하여금 위클리프의 저술을 금지하고 그의 작품을 읽지 말도록 하는 교황 칙령을 받아내고 아울러
설교는 성당과 교회, 그리고 수도원 내에서만 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이때 후쓰는 오랜 숙고 끝에 그같은 교황의 칙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유롭게 학교에서, 강의실에서도 설교를
하였다.
이 사건이 교황에게 알려졌고, 교황은 콜로나 추기경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존 후쓰를 로마 법정에 직접 출두시켜서
그가 거짓과 이단을 설교했다고 고소하고, 후쓰로 하여금 그러한 고소에 대해 변호하게 했다.
그러나 후스는 직접 출두하지 않기를 원했으며, 또한 보헤미아에서 그를 크게 사랑했던 윈세스로스 왕과, 여왕, 귀족,
대학 당국은 교황이 그런 출두 명령을 철회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또한 보헤미아가 이단이라는 고소를 받지 않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경배 장소에서 자유로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허용되기를 원했다.
세 명의 사무 변호인이 후스 박사 대신 콜로나 추기경 앞에 나왔다.
그들은 그가 출두하지 않은 것을 변호하고자 했으며, 후스 박사 대신 답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추기경은 후스가 오만불손하다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시켰고, 그의 모든 친구들과 추종자들까지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부당한 판결에 후쓰는 위원회에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교황은 1410년 후쓰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혐의로 로마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후쓰는 교황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자 교황은 1411년에 파문을 선포한다.
그러나 보헤미아 국왕과 국민들이 후쓰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함으로 교황의 파문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때부터 후쓰는 교황청과 보다 극단적인 입장에서 정면 대결을 전개해 나갔다.
그가 첫번째 한 일은 자격이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펴 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교황이 회의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교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교황이 교회를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의 사익을
위해 행동하는 교황이 과연 교황으로서의 권위가 계속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성경이야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포함하는 궁극적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음으로 교황 요한 23세가 전쟁 비용에 쓸 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그같은 면죄에 관한 신성한 것을 매매하는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후쓰의 반대 주장에 따라 많은 체코인들은 교황청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공개 시위를 벌였다.
이에 흥분한 요한 23세는 후쓰를 재차 파문시켰다.
이때 후쓰는 자기로 인하여 자기 조국 전체가 복잡한 신학 논쟁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헤미아 왕의 요구도 있고 해서 프라하시와 강단을 떠나 친구의 성채에 은거하면서 '교회론'(De Ecclesia)을
저술한다.
이 논거는 주로 위클리프 사상과 비슷하다.
이 무렵 콘스탄스에서 종교대회가 소집된다.
그런데 콘스탄스 회의는 독일 황제 지기스문트와 교황 요한 23세의 합의하에 대회가 열렸다.
이때 독일 황제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왕의 제자로 보헤미아가 이단을 용납한다는 악명을 면하기 위하여 후쓰를
콘스탄스 회의에 참석시켜 그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했다.
그리고 후쓰의 신변보호는 지기스문트 황제가 보장하겠다고 했다.
당시 콘스탄스 회의는 전 유럽에서 5천여명이나 참석하는 새 시대의 개혁을 열망하는 대대적인 회의였다.
이에 후쓰가 초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대회에 참석하여 대 개혁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후쓰가 1414년 11월 3일에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요한 23세는 회의와 상관없이 직접 재판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교황의 처소로 잡혀가 이단사상을 철회하라는 강용를 받았다.
이때 후쓰는 만약 누구든지 자기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만 하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하였다.
철저한 강요 끝에 죄수 취급을 받고 교외 저책 수도원의 독방으로 감금되면서 이단 철회를 요구당했다.
이때 지기스문트 황제는 자신이 수쓰에게 신변 안전보장을 약속했음으로 교황의 행동에 항의를 한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후쓰의 사상이 별로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기도 이단의 지지자처럼
보이게 될 것을 아고 이 문제에 손 떼고 만다.
드디어 수도원 독방에서 연금된 지 수개월 후 1415년 4월부터 심문을 거듭하다가 6월 5일에 종교회의 앞에 불려져 나갔다.
이때는 후쓰를 체포했던 교황 23세도 그곳을 도주했다가 죄수의 몸으로 다시 붙잡혀 온 때였다.
이때 종교회의 지도자들은 요한처럼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정통신학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들의 의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후쓰가 종교회의에 순종과 이단사상을 철회한다고만 하면 방면해 주겠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후쓰는 회의 앞에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서 있으면서 자기가 이단 사상을 철회한다고 하면 자기가 과거에
이단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가 됨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 앞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길이 없을을 알고 후쓰는 담담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유일한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하리라.
나는 그분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 증인들이나 오류에 가득 찬 회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와 공의 위에서 모든 개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후쓰는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다.
많은 이들은 후쓰를 따라가며 회의의 권위만 인정하면 방면될 것이므로 그렇게 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7월 6일 성당으로 다시 끌려갔다.
그의 몸에 사제복을 입혔다가 관리들이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그리고 그 머리는 삭발시키고 그 머리에다 악마의 그림을 그린 종이관을 뒤집어 씌웠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자기 저작들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시편을 낭송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들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주 예수님, 바로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후쓰는 1515년 소위 콘스탄스 종교회의 운동자들에 의해 장작더미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형집행관들은 재를 모아 호수에 뿌려버림으로 이단의 훈적을 남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몇몇 체코인들은 후쓰가 사망했선 자리의 약간의 훍을 파 가지고 체코롤 돌아가 콘스탄스가 행한 죄악을 기념했다.
아울러 보헤미아 모든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콘스탄스종교회의를 거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452명의 보헤미아 귀족들이 모여 자기들은 후쓰의 신앙에 동조할 것을 엄숙하게 맹세한다.
그리고 후쓰가 주장한 대로 자격이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후쓰의 순교는 전 보헤미아 국민들을 똘똘 뭉쳐 저항케하는 커다란 개혁혼을 불어넣어 주었다.
보헤미아 지방은 후쓰파로 일색이 되었다.
후쓰파는 두 파가 있었다.
하나는 온건파인 '호렙파들'(Horebites)이 있고, 또다른 극단파인 '타볼파'(Taborites)가 있었다.
'타볼파'는 프라하 남쪽 '타볼'(Tabor)고원을 그들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타볼파라고 하였다.
이때 보헤미아 국왕 '원체슬라스'(Wenceslas)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합법적 후계자는 콘스탄스에서 후쓰를 저버렸던 독일황제 지기스문트였다.
보헤미아인들은 지기스문트에게 4개 헌장으로 구성된 신앙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에 지기스문트 군대는 프라하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타볼파'의 지휘자인 '존 지스카'(John Zizka)는독일 군대를 대파시켰다.
두번째 전투에서 지기스문트 잔류병력은 완전히 궤멸당하였다.
1년 후에 지기스문트는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다시 보헤미아를 공격했으나 다시 패배하고 만다.
1년 후 다시 쳐들어온 군대도 물리치고, 1427년 1431년에 황제와 교회의 연합군들이 보헤미아를 쳐들어갔다가
다 패하고 만다.
보헤미아인을 무력으로 정복할 수 없으므로 바젤회의에서 회의주의자들과 협상을 통해 문제를 수습한다.
여기 보헤미아인들은 그 후에도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이들의 정신적 유산은 종교개혁과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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