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8일 화요일

종교다원주의 비판

종교다원주의 비판

 조용기 목사, "기독교에만 구원 있다는 것 유아독존적인 생각"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특강…다원주의적 종교관 논란 예상 

▲ 조용기 목사는 이날 동국대 불교대학원 특강에서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는 자신의 종교관을 밝혀 논란이 예상된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합니다.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싸우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난 5월 12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최고위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자신의 종교관을 밝혔다. 그 동안 보수적으로 알려진 조용기 목사가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피력함에 따라 상당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조 목사는 이 날 강연에서 "나처럼 평범한 목사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조 목사는 강연 초반에는 자신의 지난 목회여정에 대한 간증을 주로 이야기했다. 조 목사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며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이며 마음 속에 있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불교와 기독교는 똑같다
그러나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서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다. 조 목사는 "불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 중 똑같은 것이 매우 많다"며 "일부 목회자들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조 목사는 이어 "불교는 불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다"며 "종교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이 은퇴하면 종교간 이해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조 목사는 이 날 강연에서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강조했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는 똑같다.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 같다는 것이다"고 말해 참석한 스님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 강의가 끝난 후 참석한 스님들과 인사하는 조 목사. ⓒ뉴스앤조이 이승규

불교, 한국의 장자종교
조 목사는 또 불교가 한국의 장자종교라고 치켜세웠다. 조 목사는 "불교가 다른 종교를 포용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나갔다면 한국에서도 종교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며 "우리 집안에도 불교를 믿는 가족이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자신의 집안도 불교 집안이었다고 밝히며 불교를 친정집처럼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 목사는 현 시국에 대한 진단도 내놓았다. 그는 "한국은 원래 불교문화였다. 그러나 현재는 '지배종교'가 없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유물론과 공산주의 등이 들어와 젊은이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조용기 목사 ⓒ뉴스앤조이 이승규 
또 "한국은 현재 '지배종교'가 없어서 문화적 혼란을 겪고 있다"며 "불교와 기독교가 전도를 많이해 '지배종교'가 한국에 빨리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을 들은 청중들은 조 목사의 이런 종교관에 대해 지지를 보냈다. 강연에 참석한 한 스님은 "조용기 목사님이 하신 '마음 안에 예수가 있다'는 말씀은 그대로 부처님 말씀이고 보살님 말씀이다"며 "불교의 가르침이 목사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화답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최고위 과정은 각 불교 종단의 지도자급 이상 스님들 및 신도로서 공기업 사장 등 전문직 종사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불교대학원 최고위 과정은 그 동안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초청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6월 2일에는 강원룡 목사(평화포럼 이사장)의 특강이 이어질 예정이다. 
한편, <국민일보>는 이날 조용기 목사의 특강을 다룬 기사에서 조 목사의 종교관은 제외한 채 간증을 위주로 기사를 구성했다. 기사를 작성한 유영대 기자는 "조용기 목사님 발언 자체의 문제는 없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강연을 다룬 <동아일보>는 <국민일보>의 논조와는 약간 다르다. <동아일보>는 기사에서 "개신교 보수교단의 핵심인물인 조 목사가 불교 관련 모임에서 강연한 것이 처음인 데다 강연내용도 파격적이어서 주목된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국민일보>는 조용기 목사의 희망목회를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돼 모든 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2004년 05월 13일 



조용기 목사 "성경과 불경 가르침은 하나"
 

[동아일보]“‘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이나 ‘마음이 곧 부처(心是佛)’라는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입니다.”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인 조용기(趙鏞基·사진) 목사가 12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동국대 불교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특강을 했다. 조 목사는 스님 불자 등 70여명의 청중 앞에서 50분간 강연했다. 개신교 보수교단의 핵심인물인 조 목사가 불교 관련 모임에서 강연한 것이 처음인 데다 강연내용도 파격적이어서 주목된다.

조 목사는 “동국대의 제의를 받고 무척 망설였으나 종교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승낙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禪)불교를 신봉해 장남인 자신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불교문화 속에 살았다고 털어놨다.

“1953년 폐병을 앓아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우연히 누님 친구의 소개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예수와 인연이 닿은 것이지요.”그는 불교가 한국의 장자 종교로서 포용력을 갖고 타 종교를 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저는 케이블 불교TV를 자주 봅니다. 기독교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불교 강의를 들으며 깨닫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병조 교수(동국대 윤리문화학과)의 강의는 쉽고 재미있어 빼놓지 않고 봅니다.”내년에 정년(70세)을 맞는 조 목사는 은퇴 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밖으로는 해외선교에 주력하고 안으로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동아일보



조용기 목사 발언 논란으로 본 종교다원주의 실체
길은 많아도 ‘생명의 길’ 은 하나

기독교의 구원 진리 절대성 거부… 보편적 신앙 모델로 끌어내려 성경으로 보면 종교다원주의 명백한 이단… 경계 늦추지 말아야

지명도 있는 교계 인사가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했다는 요지의 기사가 언론에 잇따라 보도됐다(관련 기사 1면).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고 차분한 분석이 필요함을 전제하며, 기독교 내부에서 주창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는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가 “기독교에만 구원 있다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 일부 목회자들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다”라고 한 말이 일간지에 일제히 소개되었다. 진위는 따져보아야 할 것이지만, 여러 모로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종교다원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는 각각의 구원의 길이므로 서로 개방성과 존경심을 가지고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수억, 수천만 명, 수백만 명의 경건한 신도를 지닌 종교들은 모두 참 종교라고 한다. 특정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하는 진리 체계를 독점할 수 없고, 특정 종교의 가치 규범을 가지고 타종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진리 담론이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가 제시하지 못하는 구원을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헌신하면서도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을 모색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장

미국 클레아몬트신학교의 존 힉(John Hick) 교수는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라고 주장한다. ‘우주적 실재’는 한 분이지만 그 분의 이름은 문화마다 서로 다른 명칭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언어 구조가 상이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헬라인은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하고, 유대인은 ‘야훼’(여호와), ‘엘로힘’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아트만’ 혹은 ‘달마’ 혹은 ‘비로자나불’이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은 도, 천리, 천명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알라’, 한국인은 ‘하늘님’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궁극적 실재라고 하는 이명동신설(異名同神說)을 주장한다.

존 힉에 따르면, 오랜 세월 동안 종교들이 자신의 종교를 세계사의 중심에 놓고, 다른 종교를 자기 주위를 도는 행성 정도로 생각해 왔다. 기독교는 자기를 절대화하고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한다. 예수 중심의 기독교는 행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독교의 우월성 또는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기독교는 ‘예수 중심 모델’에서 보편적 신앙 모델인 ‘신 중심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역사에 출현한 모든 종교는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아홉 개의 행성과 같고,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은 모두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세계사 속에 출현한 다양한 종교는 ‘하나의 신적 실재’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르게 응답한 결과라고 한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상이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들은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응답이며,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형성된 다양한 인식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며, 특수한 전통 종교인식이 낳은 ‘우주적 실재’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한다.

존 힉은 ‘하나의 신적 실재’가 과연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답하지 못한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역사적, 문화적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해석학적으로 의존적 존재라고 본다. 칸트의 인식론을 기초로 한 트뢸치(E. Troeltsch)의 ‘역사적 상대주의’를 반영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이념, 가치, 조직체계는 상대성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 위에 정초하고 있다.

인간이 작은 붓 대롱으로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고 우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붓 대롱으로 본 하늘 역시 하늘인 것은 틀림없다. 존 힉은 이 점을 간과한다. 기독교가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접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리이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영적 암매(暗昧) 가운데 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붓 대롱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특별계시는 인간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붓 대롱이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주장

인도 태생 가톨릭교회 사제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종교다원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개별 종교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무지개 이론을 펼친다. “인류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은 신적 실재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고 한다.

백색 광선은 ‘궁극적 실재’이고, 일곱 가지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무지개의 색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들이다. 세계의 각 종교는 곧 한 개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반응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역사적 종교는 그것이 불교든, 이슬람교든 신도교든 기독교든 간에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발생시키는 파장들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고 한다. 각 종교가 가진 고유소(固有素), 다양성 그 자체가 다른 종교의 그것들과 더불어 신적 실재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

파니카에 따르면 특정 종교의 유형적 특성이 타종교를 판단하는 규범적 잣대가 될 수 없다. 다른 종교 안에는 우리가 믿는 구원 내용이 없으므로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든지, 그 종교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이 개별 종교마다 나름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지개 색상의 하나인 빨강색이 보라색에게 “너는 색깔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고, 무궁화 꽃이 들국화를 향하여 너는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백만 송이의 가짜 장미는 한송이의 진짜 장미와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진짜 장미는 인조장미를 향하여 “너는 꽃의 모양은 갖고 있지만 살아 있는 꽃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니카가 진짜 꽃과 진짜 꽃을 대조한 것은 아날로지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진짜 꽃과 가짜 꽃을 대조해야 옳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한 생명의 종교, 계시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유사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등잔 모양은 다양하지만 비쳐 나오는 불빛은 동일하다”고 한다. 각 종교의 의례, 상징, 교리체계, 성직제도, 윤리적 계명은 다양하고 서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는 동일하다고 본다. 상대주의를 전제로 한 신념이다.


“산의 등정로는 다양하지만 호연지기는 서로 통한다” 주장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은 구원관에 있다. 각 종교는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종교에도 그것은 있다고 한다. 구원은 해탈, 모크샤(moksa), 진인(眞人), 지복직관(至福直觀)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각각의 종교에서 나름대로 참 구원의 모습에 도달한 사람들은 공통의 특징을 보인다. 구원을 받은 참 종교인은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실재 중심 혹은 생명 중심의 존재로 삶의 지향성이 변한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 생명과 더 높은 진리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생사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을 하나로 꿰뚫을 줄 안다.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불국토(佛國土) 혹은 대동세계를 실현하는 데 힘쓴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등정로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 있다고 본다. 등정로마다 산의 풍광이 다르고, 산세나 기후 변화도 달라 어느 길로 산을 오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한다. 등정로가 달라도 일단 정상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통하는 것처럼 어느 종교를 통하든지 절대자 궁극적 실재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종교이다. 인격적, 공동체적, 역사종말론적 개념의 구원을 제시한다. 죄 사함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신비한 개체적 몸의 부활 신앙과 영원한 생명을 구원으로 제시한다. 한편 불교는 니르바나(해탈)의 경험을 구원으로 본다. 기타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이라고 일컫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이 영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대비시켜 동일시하는 것은 범주착각의 오류이다. 성경과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서 보면 종교다원주의는 명백한 이단이다.

주목할 것은 종교다원주의가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에 개방된 태도를 취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건전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교단, 이단자들을 제재하지 않는 교단과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신문 2004-05-18


 
혼합주의·종교주의 도전에 직면한 21세기 교회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의 공격방향은 전방위적이다. 사방이 적군들로 싸여 있다. 교회의 배타성에 대한 일반종교나 사회의 시선은 예전에도 곱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위협받는 절대 진리
진리의 유일성과 구원에 대한 오직 예수는 기독교의 존립기반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종교의 연합과 일치, 교회 안에서의 에큐메니칼을 넘어 타종교와의 에큐메니칼을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의 보도, 영화와 인터넷의 왜곡된 정보의 재생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누룩보다 더 빠르게, 광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일부 진보주의나 다원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고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구원의 주장은 언론들이나 타 종교에서 매우 좋아하고 흐뭇해하는 메뉴들이다.

한국교회에서 얼마 전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 진보그룹의 여성신학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가부장적 아버지로부터 억압당하는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아버지로 소개되는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사회문화적인 권위 가운데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었다.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변해야 하는 쪽으로 주문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돌리는 곡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구원에 대한 왜곡
그러나 하나님만 왜곡한 것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부분도 왜곡시켰다. 감리교의 변선환 학장의 사건은 종교다원주의의 단적인 예다.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다는 논리로 구원에 접근한다. 일반은총 가운데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 다르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주장이 옳다고 했을 때 한 하나님이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해놓고, 다른 종교에서는 다른 방법의 구원을 제시하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나님이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신이 한 입가지고 두 말하는 이중성과 거짓말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의 핵심은 기독교를 종교로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종교가 아니다. 굳이 종교로 분류할 때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만, 일반 종교가 세워지는 과정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21세기는 그런 기독교의 독특성을 거부한다. 자기들의 종교와 비슷하거나 동일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종교단원주의와 포스트모던에 부응하는 신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성경이 독특한 영감성을 부인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길과 하나 되는 종교
미국의 경우도 성 윤리 논란이나 구원의 다양한 길에 대한 수용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미국성공회는 지난 2월 불교선수행자인 케빈 듀 프레스터는 북부 미시건 교구 주교로 선출했다. 또한 4월 초 시애틀 교구의 앤 홀름스 레딩 신부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지만 또한 무슬림이라고 밝힌 뒤에 자신의 직임을 사퇴하기도 했다.

미국 성공회의 이런 경향은 점차 심해질 것으로 신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웨이드 클라크 루프 종교학 교수(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대학교)는 “혼합주의와 관련해 성공회의 문제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며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 자신의 종교에서보다는 다른 믿음체계에서 영적지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미국성공회는 2003년 동성애 주교를 선출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혼합주의 확산은 교회 안에 점점 동성애의 문제나 각종 성윤리 문제에 대한 허용이 미국을 넘어 각 나라로 확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동성애 대한 시각은 점점 선이 흐릿해지고 있다.

동성애를 질병의 차원으로 보기시작하면서 모든 동성애자들에 대한 시각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죄를 인권과 질병으로 몰아가고, 포장하다보면 절대 선을 넘어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동성애를 죄라고 지적하는 이들을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폄훼한다는 점에서 참기 힘들고 버티기 힘든 사회적 정죄가 깊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석화 되는 기독교 개신교의 경우도 교회는 딱딱한 껍질로 쌓여진 종교화로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종교생활은 암흑시대라고 하는 중세시대의 교회로만 족할 수 없을 만큼 21세기 교회는 종교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교회의 조직을 위해 이뤄지는 설교가 있고, 봉사가 있다. 사회의 안전망을 위한 노력과 봉사에 분주한 교회가 많아지지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지역교회들이 뛰어든 노인복지에 대한 부분도 한 편으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해결이 동기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만큼 솔직한가 묻고 싶다.

교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기보다 후원확보를 위한 개인적인 역량과 아이디어를 발휘하는게 옳은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 교회가 싸워야 할 것은 외부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겪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서 있지 않은 가운데 외부의 강력한 도전을 이길 힘은 없을 것이다.

혼합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의 도전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하나님 되심의 포기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면 기독교의 진리와 핵심을 잃는다. 다른 것은 변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변종 나르시즘
그러나 미국에서 나타나는 ‘변종 나르시즘’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자신에게 효과 있는 믿음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종교적 성향이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날 여지가 충분하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할 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복을 주실 것인가를 저울질 한다. 교회 출석은 선택사항이다. 이 선택 사항은 타종교에도 문을 열어놓고 환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령의 인도와 회개케 하는 구원의 역사는 미미하게 일어난다.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공식을 외듯이 믿고,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적이고 의지적인 영접은 매우 위험스러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성공회가 다른 교단보다 혼합주의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긍정의 신학은 미국 교회를 덮고 있다. 자기계발서 같은 설교와 주장이 미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은 “내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는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면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생각’을 ‘믿음’으로 환치했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전자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긍정의 신학을 환호하고, 교회 교육의 주요 메뉴로 가져왔다. 매우 위험한 사상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혼적인 능력은 매우 활발한 문화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가인이 놋 땅에 거하면서 이룩한 눈에 보이는 것들처럼 말이다.

누룩의 성령 역사 그러나 영적인 성령의 역사는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다. 매우 느려 보이며,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확산된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선동하고, 주장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뭔가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당장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이 없이 감정적인 충만을 성령의 충만으로 오인하면 어떡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누룩을 택해야 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인도하심에 의지하는 의존적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개입하고 통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권리의 포기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를 향한 도전은 20세기와 다른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전략을 짜기 전에, 대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전에 우리의 순결과 본질적인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21세기에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파도를 넘길 수 있는 힘은 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한 선언 가운데,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앞장서서 나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그리고 그분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혼합과 다원의 요구 속에, 우리의 이 답변은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2009년 05월 22일 (금)
교회와 신앙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행전 4/12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고 하더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딤전 4/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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