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언더우드

언더우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
(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 주석이었고, 둘째 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참고한 글 :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부인),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조선과 조선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의 일생은 조선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불타는 선교에의 열의는 물론 사회와 문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은 개화기 풍전등화와 같던 조선의 큰 빛이었다.
개화기 조선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은 그 현실을 직시했고, 그 안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들의 열정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오늘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강력히
지시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복음뿐이었으나 그 복음의 힘(Power)
이 오히려 그들의 험난한 삶을 애정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이끌었다.
이제 전환기의 조선은 그들이 배에 싣고 온 복음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비록 초기 한국교회 중 몇몇이 자생적으로 교회를 이루기도 했으나 그들 역시 복음의 빛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립과 성장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복음적 열정과 희생적 헌신은 비록 그들 중 일부가 조선 민족이 겪고
있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냉소적이거나 방관적 태도로 일관하고 때로는 군림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일궈내는 일에 그들의 땀과 피가 조선인 신자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적 수용태도와 헌신과 맞물림으로서
극대화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문>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일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출처 : 가이드 포스트 2001년 5월호에서..



『언더우드를 통해 본 초기 한국교회』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비록 초기 한국교회 중 몇몇이 자생적으로 교회를 이루기도 했으나 그들 역시 복음의 빛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받아들였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립과 성장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복음적 열정과 희생적 헌신은 비록 그들 중 일부가 조선 민족이 겪고
있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냉소적이거나 방관적 태도로 일관하고 때로는 군림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일궈내는 일에 그들의 땀과 피가 조선인 신자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적 수용태도와 헌신과 맞물림으로서
극대화될 수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본고는 그러한 초기 한국교회의 생성을 최초의 조선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의 행적을 통해 알아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 글은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1992년에 간행한 이광린 著「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우리나라 근대화와
선교활동-을 주 교재(Text)로 삼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1984년 간행한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의 「상투잽이와 함께
보낸 십오년 세월」(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을 김철이 번역한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생활」을
보조교재로 하여 요약 혹은 기술하였다.
 
1. 소년기에서 조선 선교를 지망하기까지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
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믿음이 두터웠고 화공학 방면에 재주가 있어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였고 타자기와 묵지, 안전지 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 예술원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형 존은 과학적 두뇌와 기업가적 재질을 가지고 있어서 사촌 아더와 함께 대규모 회사를 경영하였는데, 1885년경 그랜드
147번지 '호그랜드 화약회사'의 땅을 매입, 타이프라이터 기계를 제작 '존언더우드회사'를 설립하였고 '와고너'
(Wagoner)란 사람의 특허를 얻어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 회사'를 세웠다.
1865년 5세 때 생모가 별세한 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존은 부친(언더우드의 조부)인 토마스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았는데 토마스는 의학서적을 출판하는 출판업자로서
18세기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설교가이며 해외선교와 교파연합운동에 관심이 컸던 '와우'(Alexander Waugh)목사의
딸과 결혼하였다.
'와우'의 폭넓은 도량, 인류애, 통합에 대한 집념, 지도력은 외손자인 언더우드에게 영향을 끼쳤다.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교육열이 강하였다.
그는 언더우드를 인근 학교 수학시켰다가 10세 되던 해에 프랑스 '브룡 슈메르' 지방에 있는 카톨릭계통의 학교에
유학시켰다.
'존'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여 가세가 기울자 1872년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프랑스에 있던 아들과 영국의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뉴 더햄(New Durham)에 정착하여 화란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에 적을 두었다.
언더우드는 져어지(Jersey) 시에 있는 '헤스부룩'소년학원(Hasbrook Seminary of boys)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로브'교회의 목사 메이본(Mabon) 박사의 지도로 대학 진학을 위한 개인지도를 받고 진학을 위한 헬라어
과정을 6개월만에 마치었다.
언더우드는 헤스부룩 소년학원을 마친 뒤 17세 때인 1877년 뉴욕대학에 진학하였는데, 그는 이 곳에서 희랍어와
웅변과목에서 월등한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삼각법, 분석기하학, 천문학, 화학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런 준비는 후일 제중원에서 자연과학 계통의 학문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즉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의 인도 선교 소망은 열네살때부터였으나 후에 선교지방 지역을 한국으로 바꾸었다.
그는 화란개혁교회의 선교부에 한국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재정부족을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 후 북장로교회에 가서 파견을 요청하여 처음에는 거절되었으나 곧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 승인은 한국지망선교사가 파송되지 못할 형편이 되자 그의 몫으로 넘겨진 것이었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한국인 이수정으로부터 조선말을 배웠다.
한국에는 이미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 상해에 파송되었으나 곧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임지를 한국으로 옮길 것을 지시받고 1884년 9월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한국의 어려운 선교상황으로 인해 미국공사 푸트에게 보호를 요청하여 그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임명되어
표면적으로는 의사로 활동하였다.
실제로 알렌의 입국 10개월 전인 1883년 11월에 중국인 관리 왕석창이 신약전서를 반입하여 국왕에게 바침으로서
문제가 되었고 프랑스 외방선교사들 다수가 순교를 당하기도 하던 시기였다.
언더우드에게 조선 말을 가르친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즉 1882년 9월 일본으로 도피한 후 동경 외국어학교에서
조선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1883년 4월 세례를 받았고 미국 성서공회의 총무 루이스목사의 요청으로 한문성서를 토대로 하여 현토한한
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와 마가복음을 한글로 변역하였는데 1885년 초 요코하마에서 1,000부가 인쇄되었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2. 조선 부임과 결혼 그리고 선교사들 간의 갈등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같은 배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목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부인이 임신중이고, 한국정세가 불안하다는 미국 공사관의 요청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의 입국 3일 후 '알렌'에 의해 병원이 설립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약제사(dispenser)로 일을 시작하였으며
1년간 조선 말을 배우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1885년 4월 26일자와 6월 6일자로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병원에 근무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선교부 재정을 맡고 있다고 편지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다시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며,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1887년 9월 알렌이 워싱턴 주차 한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의사직을 사임하고, 1890년 7월 헤론(J. W. Heron)
이 사망하자 제중원은 빈튼(Charles C. Vinton)에 의해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조선관리에 의해 모든 재정이 장악된 제중원에서 빈튼은 재정의 원활한 운용을 위하여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였고
지나친 종교적 열정으로 병원을 하나의 종교기관으로 운영하며 종교활동을 하려하자 정부의 금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에 그는 1892년 제중원을 사직하고 자기 집에 진료소를 설치하고 조선은 병원 종사자 수를 감축함으로써 제중원은
위기에 봉착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에 있어서 병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원의 재 관장을 모색하던 중 캐나다 출신 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 박사가 제중원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언더우드의 역할이 중대했다.
그는 선교단이 왕립병원(제중원)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랬다.
그것은 왕의 관심을 사는데도 이롭고, 선교사업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크게 미칠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데도 이롭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는 북장로교 선교부에 이같은 사실을 역설하고 토론토를 방문하여 에비슨 박사를 만나기도 했다.
에비슨은 뉴욕본부에 의해 제중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893년 11월 1일 병원 운영은 정상화되었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릴리아스 호튼(Lillias S. Horton)과 결혼하였다.
파송되기 이전에 약혼자가 있었으나 선교의 비젼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녀와 파혼하고 입국한 후의 일로서 그의 나이
30세, 호튼의 나이 38세였다.
호튼은 1851년 뉴욕 주 알바니(Albany)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딸의 대학진학을 막아 31세까지 교회와 관계된 일만 하다가 선교의사가 되어 인도로 가기로 작정하여 '시카고
여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그 뒤 '에리 톰슨'병원의 수련의로 근무하던 중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조선으로 가도록 요청받아 1888. 2. 23에 조선
땅을 밟아 제중원의 부인과(婦人科)의 제2대 과장으로 일하였고, 왕비의 시의(侍醫)를 겸하여 궁중을 출입하였다.
후일 그는 '상투잽이와 함께 보낸 십오년 세월'(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이란 회고록을 썼는데, 이 책의
거의 모든 부분은 궁중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둘째 부분은 신혼여행, 셋째부분은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다툼 속에서
조선이 힘없이 몰락해 가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갑오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을사조약, 의병활동등에 대한 묘사와 시의로 우정에 가까운 친분을
쌓았던 명성황후 민씨와의 만남과 교류에 얽힌 일화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언더우드는 호튼과 함께 북부지방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개성, 솔내, 평양, 강계, 의주, 그리고 압록강 강변의 여러 읍을
방문하여 병자를 치료하고 전도하였는데, 이 책의 초반부는 이 여행의 에피소드로 가득차 있다.
선교지에서의 선교사 상호 간의 관계는 선교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파송된 선교사들 간에는 때로 의견의 충돌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 각자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았다.
알렌은 자신만만한 태도, 성급한 기질과 독설, 남의 잘못을 용서치 않는 준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 동료인 헤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헤론은 알렌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용모가 준수하였고 이로 인해 허영심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테네시주에 있는 메어리빌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알렌과는 알력관계가 계속되었고 제중원은 혼란스러워졌다.
언더우드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늘 검은색 정장으로 엄숙함을 드러내었으며 그의 용모는 지배욕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명령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남이 충고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서울의 유일한 칼빈주의 안수목사라는
자긍심으로 다른 이들과 의견이 충돌될 때에는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감리교회는 일본에 있는 원로목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의 지도를 받아 충돌이 잦지 않았으나 장로교는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나이가 모두 20대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의 충돌 요인은 정책상의 차이에도 있었다.
알렌은 당분간 전도를 하지 말고 우선 조선 국왕으로부터 총애를 얻는데 힘써야 된다고 하였으나, 헤론이나 언더우드는
선교사가 전도를 하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오겠는가 하면서 반대하였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조용히 입국하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의 고문 묄렌도르프가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부흥회에 참석하였고, 제물포로 입국한 후 여관에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까지 하였다.
서울로 와서는 조선 말로 가사를 번역하여 불렀다.
병원에서 알렌을 그리스도교를 전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한국인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와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계획하였고 알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렌을 공박하고 조선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알렌이나 외교관들은 '지각없는 경솔한 짓'이라고 몰아부쳤고 언더우드는 알렌을 가리켜 이제는 그리스도교 사업의
적이 된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충돌은 사생활까지 들추어내기에 이르렀고 심화되었다.
알렌은 헤론부인이 알렌이 선교사가 되고도 돈을 벌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비난하자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려 미국
선교부에 부산으로의 전근을 요청하였으나 수락되지는 않았다.
알렌은 자기 스스로를 '타락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선교 사업이란 하나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환멸을 느끼고 돈에 쪼들리던 그는 1886년 무렵부터 선교방면 이외에 일할 기회를 찾기 시작하여 개인병원을 열려
모색하기도 했으나 외교관을 선호하였다.
그는 조선 정부에 의해 '워싱턴주재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2년 뒤 알렌은 공직을 버리고 선교사로 환국하여 제물포에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는 헤론이 병을 얻은 후 서울 근무를 지시받았다.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 병중의 헤론의 언동은 정중하지 못하였고 다른 장로교 선교사들도 거의 같은 태도로 알렌을
대하였다.
그들은 방학중인데도 알렌의 가족이 장로교 학교 내에서 기거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알렌부부를 모욕하고 절대로
사귀어서는 안될 존재로 다루었다.
충돌은 1890년 7월 헤론이 죽고 알렌이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선교부에서 떠남으로 끝이 났다.
1887년 이래 조선에서의 개신교 세력은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영국 성공회와 호주 장로회에 의해 선교부가 창설되었고 침례교, 남장로교, 남감리교도 곧이어 들어올 준비를 하였다.
북장로교의 선교사는 일곱명으로 늘어났고 신자들은 증가하였다.
알렌이 미국으로 떠날 때 조선인 신자는 단 한사람이었으나 그가 서울에 왔을 때 신자는 15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언더우드의 활동의 결과였다.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언더우드의 방식이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3. 고아원 설립과 교육활동
언더우드는 입국 후 정동에 있던 알렌의 집 부근에 정착하여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제중원 의사 알렌, 헤론과 같이 운영하는 것처럼 서류를 꾸며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 호튼은 1890년 9월 1일에 쓴 글에 고아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고아원에는 25명 정도의 고아들이 있으며 그들은 자기 방의 관리와 대부분의 음식준비를 하면서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일을 한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자기들의 방을 정리하고 청소를 한 다음 8시까지 한문공부를 한다.
이 때 한 외국 사람이 와서 아침 기도를 인도한 다음 기도회가 끝나면 조반 식사를 한다. 다음으로 영어공부를 하고
성경공부를 계속한다. 이러한 교실 과업은 짧은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계속하고 오후에는 오락과 습작 시간과 한국
사람들을 교육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한문을 공부한다."
그 후 고아원 원아의 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차재명(새문안교회 목사)이 쓴 글에 의하면 학생의 의식(衣食)과 학비는 선교사가 부담하였는데 학생이 백여명이었다고
하였다.
이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대학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888년 9월 8일 미국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통해 조선 정부의 외아문 독판 서리 이중칠 앞으로 대학설립 허가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10일 뒤인 9월 17일 재차 공문이 발송된 후 4개월 뒤인 1889년 1월 25일 회답에 의해 설립이 보류되었다.
고아원은 밀러(F. S. Miller) 목사가 맡은 후 학교로서의 체제와 기구를 갖추고 이름을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
(救世學堂)이라고 고쳤다.
교육목표는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전도사와 교사의 양성에 두고 있었고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나아가
그들이 받은 교육 이념을 적절히 활용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도 병행하였다.
밀러 목사에 의해 경영된 구세학당은 한문과 한글, 그리고 제식훈련 등을 교육하였는데 위의 김규식은 물론 도산 안창호
등이 배출되었다.
졸업생을 중심으로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세웠다가 후에 감리교와 연합으로 수창동에 협성학교(協成學校)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05년 봄에 학교이름을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의미로 '儆新'으로 고쳤다.
1902년 연못골(연지동 1번지)에 대지를 구입하고, 건물은 웰즈(John D. Wells)목사를 기념하여 짓기로 하였다.
웰즈 목사는 미국 장로교 전도회 회원으로 선교부가 창설되던 1884년부터 외국 선교부 회장을 지내며 복음 사업을 하던
선교사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다 1903년 10월에 작고한 교역자였다.
이 때문에 경신학교를 웰즈학당(John D. Wells Academy for Christian Workers)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언더우드의 교육활동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다.
앞서 언급된 대로 그는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을 세워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목사나 전도사가 되려면 대체로 다음의 두 기관을 거쳐야 하였다.
하나는 선교부의 조수까지 되었던 그룹의 지도자, 다음 하나는 교회학교와 대학졸업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두개의 과정이 개설되었다.
조수반을 졸업한 사람들은 5년과정,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3년 과정을 지내게 하였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1904년 선교사들이 교회들에서 설립한 각 기관을 통솔하고 서로 연결을 가져야 효과적인 성과를 얻을 것을 생각하고
'조선교육협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과서에 사용되는 술어를 통일하고 교육현장의 문제를 처리하였다.
한편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문과, 상과, 농과, 신과, 수물과, 화학과의 6개로 허가를 받았으나 개교할 때는 문과, 상과, 수물과의 3과로 통합되었다.
학제는 미국을 따라 4년제로 정하였고 입학생은 거의 전부 기독교 신자중에서 선발하였다.
일본은 조선인의 고등교육을 막기 위해 대학령(大學令)을 두지 않았기에 전문학교령에 의해 연희전문학교로 조직되었다.

4. 선교활동
1) 최초의 개종자
알렌은 처음 한국에 들어와 자기 가족끼리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가 입국한 뒤 3개월이 가까이 된 6월 28일에는 알렌 내외, 헤론, 그리고 감리교의 스크랜튼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해 10월 11일 알렌 집에서 제공한 포도주와 은제(銀制) 주전자로 성찬의식이 열렸고 1886년 부활주일에는
앨런의 딸 앨리스, 스크랜튼의 아이, 서울주재 일본 공사관 통역으로 아펜젤러가 일본에서 개종시킨 사람 등 3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은밀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1886년 7월 11일 늙은 한국인 노도사(盧春京)라는 이가 헤론의 집에서 언더우드에 의해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노도사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록에 호기심을 갖게되어 갑신정변이 일어난 12월 4일 알렌을 찾아왔다.
그는 읽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지 모른다는 알렌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한문번역본을
빌려갔다.
1886년 7월 29일 미국에서 간행되는 선교잡지(Foreign Missionary)에 기고한 언더우드의 글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알렌이 가지고 있던 두개의 성경을 읽은 다음날 자기를 찾아 온 노도사에게 한두권의 중국어 성경주석과 '성당수위'
(聖堂守衛), '심령의 구원' 같은 몇권의 전도 서적과 '야소교 교리이지'(耶蘇敎 敎理易知)라는 책을 주었고 노도사는
영어예배에도 자주 참석하으며, 노도사가 세례를 청하였을 때 밀도있는 세례문답을 하였고 노도사는 기꺼이 세례를
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분간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은 병원과 학교에서 개인간의 사사로운 대화를 통하여 조용히 진행되었다.
정부에서 기독교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지 이유는, 이 종교로 인해 외국인들이 침투하고 한국인의 전통사상을 동요시킬 것 같고, 또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외국 세력을 끌여들여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관리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거리로 진출하였다.
언더우드는 노도사가 중국어로 된 기독교서적을 통하여 믿음을 얻은 것에 착안하였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 많았으므로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중국의 학자들과 손을 잡고
한문으로 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어학선생과 함께 한문으로 씌여진 교리서를 번역하였다.(번역한 책들은 이광린의 책 53-55쪽을 참고할 것)
그러한 책은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887년 6월 17일자 언더우드의 선교보고에 의하면 노도사가 세례를 받은 1년 후 9명이 더 세례를 받았다.

2) 새문안교회 설립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곳은 오늘의 이화여자고등학교 건너편 서울예원중학 자리였다.
새문안교회는 서상윤과 백홍준을 장로로 피택하였는데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입국 2년 만에 교회를 조직함으로써 고무되었다.
그는 1887년 11월 27일자로 '세계선교평론지'(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편집자에게 '한국으로부터의 강력한
호소'(A Powerful Appeal from Korea)라는 글을 보냈는데 이 글에서 조선정부는 기독교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사실이나 소극적이라는 것,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유리하다는 것, 또 조선 정부는 안정되어 있어 이웃 나라들이 함부로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이 착수하고 있는 고아원이나 병원이 모두 잘 되어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개신교회가
손을 뻗쳐야 될 때라는 것, 만약에 손을 떼면 이 나라는 천주교도들의 손안에 들어갈 것이라 하였다.
언더우드의 집에서 시작된 교회는 처음에 '정동교회'로 불려지다가 창립 3년 후에는 새문안제일교회로 혹은 새문안교회로
불려지게 되었다.
교회는 창립 1년 후 교인 수가 50명으로 늘어났고 11명이 추가로 세례를 받았다.
1889년에는 신자가 263명, 1901년에는 401명으로 늘어났다.
1895년 교회를 오늘의 경향신문사 사옥 서쪽으로 이전하였고 교회 설립 10년 뒤인 1904년 10월에 송순명을 장로로
장립하면서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당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오늘의 자리로 옮기고 1910년 벽돌로 교회를 신축, 5월 22일 헌당하였다.
헌당식에서 장로 김규식이 열쇠를 언더우드에게 헌정하고 언더우드는 설교를 하였다.
1916년 10월 언더우드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서경조 등이 동역하였다.
새문안교회는 어머니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1910년대 7개소의 '예배처소' 혹은 '전도소'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독립된 교회로 발전하였다.
한편 여럿이 모여 성경을 읽는 사경회(査經會)가 크게 성하였는데 최초의 사경회는 1888년 스크랜튼에 의해 열렸고
장로교는 이보다 2년 늦게 1890년에 이르러 언더우드가 창설한 신학반(神學班)에 기원한다.
장로교 사경회는 신자들의 호응이 커서 날로 번창해 갔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지방에도 많은 교회를 세웠다.
(언더우드가 세운 지방의 교회들은 이광린의 책 63-66에 차재명의 글을 인용하여 기술되어 있다)
 
3) 솔내교회와 맥켄지 선교사
솔내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동(松川洞)에 세워진 장로교회였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서 선교사나 목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였다.
솔내교회는 1885년 혹은 1886년 서경조의 전도로 이뤄졌다.
이것은 새문안교회가 설립되기 약 1년 전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첫번 이곳을 방문하여 신자 7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거행하였는데, 신자들의 신앙심에 감명을
받았다.
두번째 방문은 그곳 신자들이 교회 신축을 위해 언더우드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이뤄졌다.
이때에 언더우드는 신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건물을 지을 것을 독려하고 도움 요청을 거절하였다.
솔내교회는 맥켄지(Mckenzie) 선교사의 지도로 외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건물을 지었고, 1895년 7월 3일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노바 스코시아에 있는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학교 재학 시절 라브라도르(Labrador)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던 중 조선에 대한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조선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회는 지원을 거절하였고 1894년 2월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하였다.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인과 같은 방식대로 생활하였다.
솔내에 학교를 세우고 교인들과 함께 교회 신축의 일을 한지 1년여 지나 일사병과 신열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1895년
7월 자살하였다.
맥켄지는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쳤으나 그는 솔내 사람들이 맥켄지와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는 청원서와 맥켄지의
유서를 캐나다 장로교 총회에 보낼 정도로 솔내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총회는 이에 자극을 받아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맥켄지가 죽은지 3년동안 이곳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관할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포기하고 함경남-북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4) 전도여행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은 선교사들의 전도여행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당시 전도방법에는 순회전도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자가 생기면 그곳에 '선교지점'을 마련하고 '선교거점'과 연락하도록 하고 주일이면 예배를 위해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모이게 하였다.
이것들은 교회'라기보다는 '회중'이었으며 조직되지 않은 신자들끼리의 모임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선교거점'과 '선교지점'을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고 신자들을 돌보며 다스렸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1906년 통계에 의하면 3,621명의 신앙고백자, 15,079명의 준교인, 정규교인 16,000명, 그밖에
6만명의 구도자가 생겼고 619개의 자립교회, 344개의 학교가 세워졌으며, 334개가 완전자립되어 등록된 학생 수는
7,504명이나 되었다.
1909년에서 1910년에 걸쳐 '백만구령운동'이 일어났을 때 언더우드는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의 의장으로서 이
운동의 책임자가 되었다(당시 조선의 교인 수는 약 20만명 정도였다).
언더우드의 전도여행은 국내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1891.4-1893.2) 미국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미국에 조선의 실정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이 여행을 통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91년 10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강연, 10월 내쉬빌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 강연은 신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강연으로 테이트, 존슨, 레이놀즈, 젼킨 등이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이로인해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캐나다에서의 강연의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O. R. Avison)으로 하여금 조선으로 오게끔 한
기회가 되었다.
1905년에 이르러 언더우드는 심한 질환을 앓게 되었다.
요양을 위하여 스위스로 갈 것을 권유받아 1906년 7월 동남아 코스로 지중해를 거쳐 스위스에 도착하였다.
1907년 4월 병이 호전되자 프랑스 '파리'로 가서 형의 회사인 '언더우드타이프회사'의 지점을 잠시 운영하였다.
지배인이 파리로 돌아오자 스위스로 건너갔다가 조선으로의 환국을 준비하였다.
이즈음 미국을 방문한 그는 선교본부를 찾아가 조선에 대한 선교를 역설하여 1907년 10월 29일 실행위원회가 열려
한국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충원과 선교비의 지원을 요청하여 선교부는 기부금 모집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뉴욕과 시카고, 신시내티 등지로 여행하며 1907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한국의 호소'(The Call of Korea, 한국
개신교수용사로 번역됨)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1909년 초겨울에는 미국 서부를 여행하였고 1910년 5월 17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기부금은 평양의 중학교, 신학교, 병원, 강계와 선천의 학교와 병원, 서울의 학교와 조선성교서회, 청주의 병원등에
보내졌다.
그는 평양에서 연차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시베리아를 거쳐 8월에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5) 천주교도와의 대립 속에서
1902년 황해도에서 일어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의 갈등은 프랑스 출신 천주교 신부 빌헬름(Wilhelm, 홍석구)의 관할
하에서 일어났다.
1901년 1월 천주교인 6명이 성당 건축을 위해 4명의 개신교인에게 기부를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한 개신교인들을
감금 폭행함으로써 사건은 전개되었다
(호튼은 그의 책 "상투...."에서 한 개신교인이 천주교회에 돌을 던짐으로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헐벗이 '한국평론'에 카톨릭을 탄핵하는 글을 싣고 천주교인들의 행동을 자세히 기술하고 빌헬름 신부를 공격하였다.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 사이엔 긴장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언더우드는 미국 공사와 선교부의 지시로 1902년 2월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직후 해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빌헬름 신부는 이를 재판에 붙였고 재판 참관인으로서 황해도 감영으로 언더우드와 마펫이 다시 파송되었다.
신부들은 순검을 결박하여 재판관에게 자기들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숨겨놓았던 범인들을 도피시켰고 급기야 재판관은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재판정의 심문을 통해 빌헬름은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였고 11명에게 태형, 5명에게 구류처분이 내려졌다.
언더우드는 이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7주간을 해주에서 지냈다.
이 사건은 개신교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 선교사들이 방관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6) 선교정책의 확립
언더우드가 입국한지 6년째이던 1890년 6월 중국 산둥성 치우에서 활동하던 존 네비우스 부부가 미국으로 가던 중
내한하였다.
그는 '선교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이란 논문을 상해에서 간행되던 The Chiness Recorder 라는 잡지에
기고하였고 조선에 체류하던 2주동안 이것을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많은 선교사들에게 흥미를 주었고 선교방법으로 채택되어 '네비우스 방법'(Nevius Method)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이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누구나 그리스도를 발견한 그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고 각자는 독자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직업에 의해 스스로 살아나가고 이웃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가르친다.
2) 교회의 운영 방법과 기구를 지방 교회가 관리하고 경영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발전시킨다.
3) 교회 자체가 인원과 재력을 제공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자격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뽑아 이웃 사람에게 복음 전도의
임무를 맡긴다.
4) 지방 사람들에게 그 지방의 건축양식으로 지방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예배당을 짓게 한다.
네비우스 방법은 스스로 전도하고(自進傳道, self-propagation), 스스로 유지하고(自力維持, self-support), 스스로
다스린다(自主治理, self-garvernment)는 원칙으로 요약된다.
이 방법의 채택으로 초기 한국교회는 교회를 스스로 세우고 유지하였다.
새문안교회가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자력유지는 교인들의 규칙적인 헌금습관과 스스로 전도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고, 한국의 고유 양식에 따른 건축으로
소박하고 토착적인 모습을 가능케 하였다.
자주 치리는 교역자 양성문제와 교회 통치기구의 조직, 권징의 문제와 관련이 되는데 교역자 양성에 있어서 희생적이고
자신감과 자존심을 가진 한국인 교역자를 선택코자 하면서도 한국인 교역자의 지식정도를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하기도
하였다(레이놀즈의 제시 참고, 이광린의 책 135-136).
이것은 교역자 수준의 저하로 인하여 이후의 세대간의 갈등요인이 되었다.
네비우스 방법이 끼친 영향 중 사경회는 중요한 결과물이었다.
성서에 대한 강조는 사경회의 융성을 가져왔고 언더우드의 '신학반'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권징의 문제는 다소 느슨히 적용되었다.
초기 한국교회가 제사는 금지했으나 축첩의 문제는 확실히 하지 못하였는데 너무 쉽게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성급히
장로를 세웠다는 비난이 이에서 초래하기도 하였다.

7) 선교구역의 확정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대체로 협력이 잘되고 있었다.
네개의 장로교 선교부(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는 교회로서는 하나였고 두개의 감리교
(미국 북감리교, 남감리교)도 한 학교에서 신학교육을 시행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의료, 교회 사업, 종교서적 출판 등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1893년 협정서(이광린 책 205-206 참고)를 교환하여 선교구역으로 인한 마찰을 방지하였다.
그 내용은
1) 대도시의 선교는 공유하고
2) 5000명 이하 도시에 선교부가 지부를 설립했을 시에는 6개월 이상 활동을 하지 않는 일이 없다면 다른 선교부가
들어오지 않을 것
3) 새로 시작하거나 확장하는 선교회에는 미점유지역을 권고하여 속히 전국을 망라하도록 할 것
4) 파 교파로의 이명을 인정하되 소속교회의 추천서를 가진 자에 한 할 것
5) 여러 교회의 권징결정 상호 인정
6) 조사, 학생, 보조자들은 이전 관계했던 사람과의 사전협의 없이 다른 선교부에 의해서 자격이 주어져서는 않된다.
7) 원칙적으로 책은 팔아야 하며 무료로 주어서는 안되며 협정가격을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00년 이후 관서지방 교인들의 증가로 선교구역의 재조정이 필요케 되었다.
1905년 9월 15일 6개의 선교부가 모여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기관은 단일 복음주의
교회를 창설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공의회는 실행위원회를 두어 폐회 중 각 선교부에서 제출한 문제를 처리하고 선교지역을 나누는 일을 하였으며
(선교구역 분할과정 및 분할 내용은 이광린의 책 208-210을 보라), 학교, 병원 등의 공동 운영과 주일학교 공과,
찬송가의 편찬, 그리고 '한국선교계'(The Korea Mission Field)라는 잡지와 신문을 발행하였다.
 
5. 구제활동과 선교의 장애요소들
1886년 여름은 전국이 콜레라가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당시 상황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생활'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128쪽 이하) 콜레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그야말로 무지 그 자체였다.
질병의 원인도 해결책도 없이 사람들이 쓰러져 갔다.
이런 때에 언더우드를 위시한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돌보아주었다.
릴리아스 호톤의 글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도랑에 석회가루를 뿌려 질병의 근원을 억제하고 진료소를 개설하고
저녁마다 그 뜰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다.
또한 간호부를 조직하여 병자들에게 살롤이란 약을 투약하고, 그들을 따뜻한 곳에 눕히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의 경직되고 차가워진 몸을 문질러 간호함으로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진료소에 온 환자는 172명이었는데 62명이 죽었다. 18명은 도착했을 때 죽어 있거나 죽어가고 있었고 95명은 몸이
경직되어 들어왔는데 그 중 42명이 죽었다.
35명은 몸이 아주 쇠약해서 들어왔는데 2명이 죽었고 4명은 부분적으로 쇠약했는데 이들은 모두 회복되었다.
죽은 사람들 중에 25명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3명은 뇌막염, 1명은 만성 방광염의 후유증을 앓았고, 1명은 만성
신장염을 알았다. 그외 나머지는 회복되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기독교 병원에만 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이 외국인들이 어쩌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할까? 이 사람들이 남에게 하는 것만큼 우리가 우리 애들에게 할
수가 있을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난관은 질병뿐만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1888년 4월 정부로부터 기독교 전도 금지령에 직면하였다.
이 금지령은 본래 천주교회를 겨냥하여 내려진 것이었다.
천주교인들은 궁궐 안과 역대 임금들의 신주가 있는 종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역에 교회를 지으려 했다.
이에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공사를 강행하였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제동을 거는 정부의 포고로 발전하였다.
아펜젤러와 함께 북부지방을 전도여행하던 언더우드에게도 서울로의 귀환이 명하여졌다.
5월에서 9월까지 학교에서 아침예배와 주일예배가 금지되었고, 신자들은 공포에 싸여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불태웠고
종교의식도 행할 수 없었다.
금지령이 내려진 두달 후 일종의 외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외국인에 대한 헛소문에 기인하였다.
외국인들이 한국인 악질분자를 돈으로 매수하여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으며 그 눈알을 빼어다가 안경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내다가 양약을 만들어 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은 아이를 잡아먹는 도살장이고 공사관은 아이를 먹는 곳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격분한 군중들은 외국인들에게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외국인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에 미국 공사 딘스모어는 외아문 독판 조병식에게 공문을 보내어 허무맹랑한 헛소문에 대해 정부의 조처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며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의 태도는 신중하였다.
북부지방 여행시 소환결정에 신속히 응하였고, 애기소동이 있을 때에는 출근하는 호튼여사를 호위하며 가마에
숨기기도 하였다.
기독교 전도 금지령이 내려졌을 때에는 한국정부의 명령에 순응함으로써 관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콜레라가 만연하였을 때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관리들과 국민들의 오해를 풀게 하고
오히려 선교사업을 칭찬하고 옳게 여겨 정당한 인식을 갖게 하였다.

6. 다방면의 활동상
1) 사전편찬
서양인으로서 우리말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였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들이 뒤를 이었다.
감리교 선교사요 의사였던 스크랜튼은 이들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용기와 인내를 갖고 순교까지 하면서 최초의 사전을 만들어 준 프랑스인들에게 우리 모두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 독본의 저술을 통해 우리들에게 한글을 깨우칠 수 있게 한 '존 로스'목사의 공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또 성서 사업의 결과로 몇 사람의 한국인 협조자를 얻었고,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목사와 함께 성서
번역사업을 개척하여 성서적 한국어의 기초를 닦아준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일본 체류 때, 그리고 입국 후에도 조선말을 익히는데 열심이었다.
입국 1년 후인 1886년 1월 30일자로 선교부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어떻게 사전을 출판해야 할지 걱정할 정도로
진척되어 있었다.
그 뒤 3년 후에는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주석이었고 둘째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2) 성서번역
선교사업에 있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성서를 그 지방 말로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이었다.
만주의 존 로스 선교사는 1874년 어학선생 이응찬과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 목사와 함께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간행하고,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등을 국내로 들여보내 성경을 팔게 하였고, 1879년에는 서상윤, 서경조 형제도
파송하였다.
이어 다른 복음서의 번역도 완료하자 봉천(奉天)에서 인쇄소를 설치하여 성경을 간행하였다.
한편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참고로 하여 '마가복음'을 번역케 하여
요코하마에서 간행하였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에게서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그러나 만주와 일본에서의 번역본은 지방사투리가 많았고 언해(諺解)식이어서 불편하였다.
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던 것이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 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1893년 5월 기구가 개편되었는데 상임성서위원회는 상임실행성서위원회로, 번역위원회는 전임 번역인반으로 개편되고
수정위원회가 폐지되었다.
상임실행성서위원회는 성서의 번역, 수정, 간행, 전임번역반 5명 선발의 권한을 가졌는데 북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와
게일, 북감리교회에서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성공회에서는 트롤로프가 임명되었고, 1895년 가을 남장로교회의
레이놀즈가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게일은 1890년부터 1893년 사이에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서, 요한1서를, 스크랜튼은
로마인서와 야고보서의 일부, 창세기의 일부, 출애급기, 시편을, 언더우드는 누가복음과 시편의 일부를 번역하였다.
신약의 번역 완료 후 성서 번역인단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원전을 가지고 번역에 착수하기 위해 1902년 독회를 열었는데
아펜젤러가 이 독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여 게일과 레이놀즈 그리고 언더우드가 주로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 외에 펜윅 목사, 존즈 박사 트롤로프 신부와 문졍호, 김명준, 정동명이 이들을 도왔다.
번역은 1904년부터 본격화하여 1910년 구약번역을 완료하여 1911년 인쇄하였다.
성서의 보급은 성서공회의 대리인에 의해, 그리고 선교사의 지휘를 받는 권서인(勸書人)들과 전도 부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1903년 3명의 권서인과 19명의 전도부인이 성서공회에 채용되어 1904년 이후 5만 부 이상, 때로는 1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성서 판매량이 급속히 증가한 것은 선교사들이 교인들에게 성서소지를 권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서는 조선교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사경회의 성공도 이에서 기인한 바
크다할 수 있다.
성서의 순한글 번역은 한국사회의 문맹퇴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성서번역에 있어서 신(神)에 대한 칭호 문제가 대두되었다.
중국어에는 天, 天主, 上帝 등이 있고, 한국어에는 '하나님'이 있는데 어느 칭호가 가장 기독교 신관을 잘 표현하는
지를 고민한 것이다.(언더우드부인의 조선생활 103-105)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마펫에게 보낸 편지(1894.5.18)는 호칭문제에 대한 설문형식을 띠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는 천주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펜젤러는 천주라는 용어 사용을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을 반대하고 천주 대신에 하나님이나 상제를 선호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언더우드도 한때 天主 혹은 上帝를 사용했으나 1894년 이후 찬송가를 편찬하면서부터는 '하나님'으로 통일하였다.

3) 찬송가 편찬
성서번역과 함께 찬송가의 편찬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초기 예배에서 찬송가는 중국어로 된 것이었던 것 같다.
찬송가는 큰 종이에 써서 교회 벽에 걸어 놓고 부르다가 1891년 감리교의 존스(George Herber Jones, 趙元時)목사와
로드윌러(Louis C. Rothwiler) 양의 공편으로 악보없는 찬송가 27곡이 번역되어 나왔다.
언더우드는 1889년 여름 찬송가 20-30곡을 선별 절반정도를 자신이 번역하여 책자를 만들었으나 공표 되지는 않았다.
이에 자극받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는 합동찬송가를 편집-간행키로 하여, 장로교에서는 마펫을 감리교에서는 존스
목사를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존스 목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한 후 언더우드로 대치되었는데 1894년 육영공원 교사였던 벙커의 도움을 받아 간행되었다.
그러나 연차대회에서 이 책은 채택이 거부되었다(거부 이유는 이광린 책 141쪽을 참고할 것).
그러나 언더우드는 이 책을 일본 요코하마 셰이시 분샤에서 인쇄하여 서울 삼문출판사에서 판매케 하였다.
찬송가에는 116장의 노래와 117장 주기도문, 118장 여호와의 열가지 경계(십계명), 119장 주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기도문이 두번 수록되어 있다).
이 책 서문에서 언더우드는 여러 사람이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조선 교인들이 작사한 7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1893년 경 조선 교회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 찬송가는 남장로교회와 일부 감리교회 그리고 언더우드의 영향하에 있던 장로교회에서 당분간 사용되었고
언더우드는 계속 수정, 보충하여 1896년에는 160곡으로 된 3판을 발행, 164곡의 1898년 4판을 발행하였다.
1905년에 이르러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단체들 간에 합동운동이 논의되었고, 그 해 9월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가
서울에서 모임을 갖고 감리교 선교부와 합동으로 찬송가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였고, 감리교가 수용하였다.
이것은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의 결성과 초대의장 언더우드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찬송가 편찬은 난항 끝에 1908년 262곡으로 합동찬송가를 출판하였다.
 
4) 그리스도 신문 간행
1896년 4월 서재필이 순한글로 간행한 독립신문은 조선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것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선교에 있어서 신문의 역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1892년 부터 선교사들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라는 월간 잡지를 간행하고 있었으나 이것은 영어로
되어 있어서 조선인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았기에 순한글의 신문 간행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은 1893년 1월 제1회 장로회 공의회가 열렸을 때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채택하면서 추가한 다음과 같은 항목의
영향이었다.
1) 양반계급보다 노동자계급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전도한다.
2) 부인들을 개종시키는 일과 처녀들을 교육시키는데 특히 힘쓴다.
이는 어머니가 후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3)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기록한다.
선교정책면에서 한글 신문에 처음 손을 댄 것은 아펜젤러였다.
그는 1897년 2월 2일 '조선 크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언더우드는 이에 자극을 받아 그해 4월 1일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주 단위로 발간되었고 8면에 달하였다.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데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도 농사 및 공업에 관한 글, 일반교양, 교회소식, 외국소식 등에
대해서도 많은 면을 할애함으로써 비그리스도인들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언더우드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이 신문사를 통하여 국민계몽을 위한 여러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광린의 책 170-171을 보면 목록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신문은 1901년 5월 언더우드가 안식년을 당하여 게일이 편집자가 되었고, 1905년 7월 1일부터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그리스도신문'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어 1907년 9월 27일까지 간행되었다.
언더우드가 신병 치료차 스위스로 떠나고 1907년 11월 13일에 '예수교 신보'로 개칭되었다가 1910년 다시
'예수교회보'로 바뀌었고 1915년 감리교의 '그리스도회보'와 함께 '기독신보'로 바뀌었다.
 
5) 기독교청년회 설립
선교사업은 크게 진전되었으나 교회 안에는 젊은 층이 극히 부족하였다.
1899년 150명의 조선 청년이 뉴욕에 있는 기독교 청년회 국제 위원회에 청원서를 보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다음 해에 공동명의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국제위원회의 반응은 호의적이어서 질레트 (Philip L. Gillett, 吉禮泰)총무를 1901년 9월에 파송하였다.
질레트는 언더우드에게서 실정을 듣고 한국어를 학습하고 6명의 조선 청년들과 등산을 하고 8-10명의 청년들과
성경반을 조직하고 운동을 같이 하였다.
국제위원회에서 간사가 파송됨으로 회관 건축이 진전되었다.
모금은 생각보다 원활히 진행되었다.
질레트는 선교사들의 충고대로 상류층 젊은이들을 YMCA운동에 가담시켰다.
외국어 학교 학생들과 군인들을 접촉하고 포섭하였다.
1903년 10월 28일 기독교 청년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헌장이 채택되었다.
청년회의 이사진은 미국인 5명, 영국인 3명, 캐나다인 2명, 일본인 1명, 한국인 2명으로 구성되었고, 초대회장에는 헐벗,
부회장에는 게일이 피선되었고 1년 뒤 서울 총회에서 회장에 게일, 부회장에 헐벗이 피선되어 그 체제를 유지했다.
언더우드는 미국인 이사중 하나였다. 그는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이사로 재직하였다.

6)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취임
장로교 교회와 신자수가 증가하자 선교사들은 1889년 장로교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미국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가 연합된 것이었다.
회장에 헤론, 서기에 데이비스가 선출되었다.
이 공의회는 3,4차례 모여 안건을 처리했으나 헤론의 별세 후 폐지되었다.
1893년 다시 공의회가 설치되어 선교사들만이 회원이 되었다.
(당시에 조선인 목사가 없었고 장로들의 숫자도 적었다.)
회장에 레이놀즈가 추대되어 1900년까지 활동하였다.
1901 조선 장로교 공의회가 조직되어 1906년까지 존속되었는데 회원은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 선교사 25명으로
구성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회와 영어를 사용하는 회로 나누어 일을 처리하였다.
1907년 9월 평양에서 네개의 장로교가 연합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조선인
장로 40명 선교사 38명으로 마펫이 회장으로 추대되고 언더우드가 도왔다.
이 회에서 조선 7명이 목사로 안수 받았다.
1909년 평양에서 개최된 노회에서 언더우드가 회장으로 부회장에 이기풍,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가 선출되고
1910과 1911년에 게일과 레이놀즈가 회장이 되었다.
노회는 웨스트민스트 신경과 '성경요리문답'을 바탕으로 헌법을 제정 칼빈주의적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11년 9월 대구에서 열린 노회는 총회를 조직키로 하고, 각 노회들을 연합하여 총회를 조직, 언더우드를 총회장에,
길선주를 부회장에 선임하였고 총회 창립을 기념하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을 중국 산동성 래양현에 파송하였는데
이 시기에 이미 10명이 넘는 선교사를 북간도, 시베리아. 일본, 제주도 등지에 파송하고 있었다.
당시 장로교의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총회
노회
당회
미조직교회
교회건물
조선인목사
외국인목사
1
7
134
1,920
1,438
69
77
장로
조사
장립집사
세례교인
학습교인
신자총수
225
230
16
53,008
26,400
127,228
 
7) 일제 하의 선교사들
선교사들은 1905년-1910년까지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조선이 청국이나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 무지몽매해져 구제할 방도가 없으나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문명 개화를 표방하고 있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면 조선인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보호조약이나 합방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불편중립주의를 내세워 방관하였다.
더 나아가 일본을 적극 지지하는 친일파도 있었다.
감리교회의 감독 해리스, 북장로교의 쿤스, 클라크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편지에 의하면(이광린의 책 223-225) 미국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조선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을 경우에도
일본인에 대해 항상 중립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려운 시기에 황제가 언더우드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고, 내각에서 친정부 신문 발행을
요청했을 때에도 '그리스도 신문' 발행을 빌미로 거부하였다.
또한 언더우드는 황제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사절을 파견할 때 동행하여 대표를 돕도록 요청하였을 때도, 학부의
고문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할 때도 불편중립주의를 내세워 거절하였다.
이런 선교사들의 태도는 조선인들이 선교사들을 달가워하지 않게 된 한 동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는 않았고 선교사들 밑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이광린의 책 225-226참고)
그러나 선교사들의 태도는 한일합방 후 점차 바뀌었는데 이른바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기독교 지도자 100여
명을 투옥 탄압하는 것을 보고 그 동안의 생각을 수정한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의 배후에 외국세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제거하려 하였다.
YMCA를 일본 YMCA 산하로 복속시키고 1913년 6월 질레트 총무가 추방되고 져다인 회장이 미국으로 귀국한 후 일본의
세력을 확장시키다가 1916년 7월 일본인 3명을 명예 이사로 파송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일본 YMCA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서울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려 일본측과 접촉하고 있었기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7. 큰별 땅에 떨어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고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교제를 넓혔다.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신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가는 말
조선과 조선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의 일생은 조선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불타는 선교에의 열의는 물론 사회와 문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은 개화기 풍전등화와 같던 조선의 큰 빛이었다.
개화기 조선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은 그 현실을 직시했고, 그 안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들의 열정은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그대로 녹아 있으며, 그들의 사랑은 오늘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강력히 지시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복음뿐이었으나 그 복음의 힘(Power)
이 오히려 그들의 험난한 삶을 애정과 열정 그리고 헌신으로 이끌었다.
이제 전환기의 조선은 그들이 배에 싣고 온 복음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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