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7일 월요일

교권주의 비판-2 (교권주의 비판)

교권주의 비판-2 (교권주의 비판)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음 
- Wayne Schlichter -
성직자와 평신도의 정의 
웹스터 사전은 '성직자(clergy)'를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직 수임식에 의해 구별된 일단(一團)의 사람들"로 정의한다. 마찬가지로 "평신도(laity)"를 "성직자와 구별된 사람들"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성직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자들이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니골라당(계 2:6,15)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위를 구별하는 악한 예이다. 니골라당은 "정복하다(conquer)"를 뜻하는 그리스어 "니코(nico)"와 "백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라오스(laos)"에서 유래한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 니골라당이 되었으며, 그 의미는 "백성을 정복하는 자"이다. 웹스터 사전이 정의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는 둘 다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약교회의 양식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인도직(Leadership)
성경이 정의하는 지역 모임의 직분으로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 장로들(elders)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 떼를 치는 목자(shepherd)로 부르신 영적으로 자격을 갖춘 성숙한 자라야 한다(벧전 5:1-4). 집사들(deacons)은 지역 모임의 물질적인 필요를 준비함으로 지역 모임을 섬기는 영적으로 자격을 갖춘 자이다(행 6:1-8; 딤전 3:8-13).
"목양자들(pastors)"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온다(엡 4:11).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 "목자들(shepherd)", 또는 동사의 형태인 "양을 치다(shepherd)"로 번역되었다. 에베소서에서 목양자들은 가르치는 은사(pators and teachers)를 가진 장로들이다(딤전 5:17).
성경은 "일인(一人)" 사역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지역 모임의 영적 감독자들(overseer)(감독)과 목자들(목양자들)인 복수의 장로들/목양자들을 본다(벧전 5:1-4; 행 20:17, 20:28-30; 엡 4:11). 그밖에 모임의 물질적인 필요를 돌보는 집사들이 있다(행 6:1-6; 빌 1:1). 지역 모임 안의 인도직을 다루는 모든 성경 구절은 항상 복수형임을 주지해야 한다(행 11:30. 14:23, 15:11, 21:18; 딤전 5:17; 딛 1:5; 히 11:2; 약 5:14).

성직자제도의 뿌리
성직자체계의 뿌리는 사사기 17:9-18:31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은사를 상품화하려는 "고용인(돈 받고 일하는 사람 : hireling)"의 개념을 본다(벧후 2:3). 그는 또한 "아버지(father)"라는 이름을 취함으로,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과 구별하였다. 오늘날의 실행도 거의 동일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인 의무에 대한 책임의 대가를 사역자(ministers)/성직자(clergymen)에게 지불하며, 주님께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면한다. 성직자체계는 영적 삶을 세속적 삶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성향에 기초한 세상의 체계이다. 성직자는, 그가 영적인 사람이든 아니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와 제사장이 된다. 이제 영적인 책임은 성직자의 것이 된 것 같다.

교회 계급제도 : 성직자 체계의 문제점
오늘날 믿는이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직자"와 "평신도"란 용어는 기독교계 안에 계급제도라는 종교적 구조를 낳았다.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진리는 인간 조직의 계급제도 안으로 실종되었다. 그 결과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비활동적으로(inactive) 되었고, 다른 이들은 으뜸이 되려고 했다. 이는 성직자/평신도의 분리가 건전하지 않으며, 성경적 기초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요한삼서 8-11에서 디오트레페스는 자신을 권위로 대체함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남용했다. 그는 요한과 다른 형제들을 모임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거절했다(9절).
디오트레페스는 악한 말로 그들을 헐뜯고,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까지 금하여 교회 밖으로 내어쫓았다(10절). 11 절에서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따르지 말고 선한 것을 따르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하며, 디오트레페스에 관한 논의를 끝맺었다. 우리가 필히 내려야 할 결론은 결코 디오트레페스도, 그의 본(本)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효과적인 사역을 위하여 믿는 이들 가운데 주어진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충족성을 가르치기 때문에, 성직자는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다(엡 4:11; 고전 12-14 장; 롬 12:20; 벧전 4:10-11). 은사를 받은 믿는 이들이 사역의 일을 거절하고, 구원받은 자이든 구원받지 못한 자이든, 인위적으로 임명된 사역자들을 받아들일 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합당한 지위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는 "신약 경륜 안에서 성령님을 거스리는 죄"이다.
교회가 이러한 성직자체계에 연류되었는지의 여부는 은사를 받은 모임의 형제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기초 위에서 공적 사역을 할 수 있으며 함께 나눌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어떤 모임이 그 모임에서 임명받지 않은 한 은사 있는 형제가 방문하여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역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드리려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곳에는 성직자체계가 있으며, 이는 성령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  론
히브리서 7,8,9 장은 옛 언약이 그 레위 제사장 직분과 함께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다고 계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죄를 위한 그분의 희생물이 이 새 언약을 제정하였다(히 10:9-10). 또한, 모든 믿는 이는 이 새 언약 아래서 거룩한 왕가의 성직자(제사장)이다(벧전 2:5,9).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때 이러한 진리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경륜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적인 교리와 사람의 전통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AD 300년경에는 조직화된 보편적 교회가 생겨났다. AD 325년경 이 교회는 콘스탄틴의 찬의와 지지를 받으며 세속화되었다. AD 500-600년경에 로마 캐톨릭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연합하였으며 부패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머리와 이 세상의 사령부를 가졌다. 이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겠다고 했던 교회가 아니었다(마 16:18). 또한 교회의 신비에 대한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양식(pattern)을 따라 세워지지 않았다(엡 3:3-10).
16 세기와 17 세기에, 몇몇 그리스도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알았다. 그들은 저항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세웠다. 그 결과 복음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성경에 기록되고 초세기에 실행되었던 신약교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자신들의 계급제도로 교파를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실행이 되었다. 이들은 계속하여 성직자-평신도 체계를 고수했다.
때때로 작은 그리스도인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고, 성직자/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신약 양식을 따랐다.  오직 사람의 전통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힘써 따름으로 믿는 이들은 다시 한 번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참된 자유를 찾을 것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라

교회와 교육, 1996년 10월호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은 종교개혁이었다. 만일 이 개혁운동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그 본질과 복음을 결여한 외형적이고 변질된 종교단체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세속화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진화론적으로 인식하여 역사의 변천과 함께 교회와 그 가르침은 변할 수 있고 변해야 이 세계에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복음의 불변성과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믿기 때문에, 아무리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도 기독교의 본질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끊임없이 세속화와 변질의 유혹을 받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수호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반복적인 자체개혁과 원상회복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혁교회는, 칼빈이 정의한 대로, "부단히 자기를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인 것이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 것같이, 개혁을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에 필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떤 면에서 개혁되어야 하는지를, 1544년 칼빈이 쓴 "교회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라는 논설문에 비추어 조명해 보고저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가 비록 세상에서는 상당히 무시되고 거부되지만, 적어도 교회에서는 완전히 존중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이를 대항하는 악의 세력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야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을 대항하거나 약화시키도록 만든다.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욕은 세속 정치가들뿐 아니라 교회의 권력을 추구하는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나며,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은 자기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교회에서 몸이 아닌 머리의 역할을 주장하게 된다. 종교개혁을 요청했던 중세교회의 상황은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의 난무로 인하여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칼빈은 당시의 교회정치가 전제군주보다도 더 난폭한 독재자들의 "폭정"으로 화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의 말씀"이라고 정당화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으로 정죄해 버리고, "일단 장악한 횡포의 지배권을 어떻게 해서라도 확보"하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교회안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주권을 장악하며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교권주의자들을 그는 결코 방관할 수 없다고 외쳤다: "개라도 자기 주인에게 난폭하게 행하면 즉시 짖어대며 덤벼들거든, 하물며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모욕적으로 무시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에는 "단순히 그리스도만이 지배하시며 단순히 그리스도의 음성만 들려야" 하는데, 인간이 지배자로 군림하면 더 이상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었기에 개혁자들은 교회개혁의 기치를 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어떤 교단들에는 한사람 혹은 일단의 교권주의자들이 모든 교권을 장악하고 성경과 교회법 상위에 위치하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면 여지없이 제거 혹은 억압하고 있다. 그 교단 어디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가 있는가? 교회들중에도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인 목사들이 있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인도보다는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전횡을 일삼으면서도 성경과 성령을 내세우고 있다. 그 교회 어디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임하여 있는가? 그런가 하면 많은 평신도단체나 교회기관은 주님의 뜻과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지혜와 사회단체의 세속적인 논리로 운영되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는 정치의 세속화로 시작된다. 초대교회 3백년동안 교회는 보다 순수하였으나, 콘스탄틴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성직자들이 로마제국의 정권에 의해 보호되고 나아가 정치적 특권을 누리게 되면서, 그러한 세속적 정권의 위대함을 흠모하고 교회 안에 하나의 로마정권을 수립하고저 계급적인 교권조직을 형성하면서 중세교회는 세속화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교회는 결코 정권을 흠모하거나 모방하여고 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주권만이 통치하게 해햐 하며, 목사와 장로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심으로 겸허하게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도력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그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요청되는 자격은 바로 겸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속하는 자만이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에게는 분명히 지도자적인 역량이 있었지만, 성경은 겸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를 버린 이유는 그의 교만에 있었다. 자기에게 부여된 기능 이상으로 자기의 권력을 확대하여 절대권력을 향하려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정권을 빼앗아 겸손한 다윗에게로 옮기신 것이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인간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점차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지도자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무시할 때는 그에 항의하고, 독재화될 때는 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에 대하여 개혁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의 방관과 관용에 의해 교회는 더욱더 타락하고 독재자가 교황과 같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그리스도의 주권을 탈취하고 교회밖으로 밀어내는 죄악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당시에 여러가지 개혁무용론이 대두되었다고 소개하는데, 그중 두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는 운명론으로서,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갑자기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교회가 너무 타락하여 회복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고치려해도 허사다"는 비관론이 숨어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물론 교회의 개혁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의 종으로서 그의 일을 성취하는 입과 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평화주의로서, 개혁운동이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의 외형적 일치를 파손한다는 주장이다. 실로 개혁운동은 하나의 투쟁이며, 이는 자연히 싸움과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면 모든 투쟁과 싸움은 다 나쁜 것이라고 정죄해 버리며, 그럼으로써 기존권력의 유지를 수호한다. 칼빈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평화를 되찾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들이 침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를 배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할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이며 결코 교회에서 독제를 관용하므로 그리스도의 주권이 짓밟히는 상태를 연장시키는 묵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스또예브스키의 소설 {카라마조브의 형제}에 보면, 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던 중세에 예수님이 스페인의 세빌에 방문하여 대재판관인 추기경과 만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 교회지도자는 예수님을 체포 수감하고 밤에 조용히 찾아가, '당신이 준 자유를 모두가 가져와 우리에게 주었는데, 다시 자유를 되돌려 주는 것은 우리 일을 매우 힘들게 하는 것이다'고 비난하며 '모든 이단중의 가장 악한 자'로 정죄하여 내일 화형에 처하겠다고 말한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교회지도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약화되고 사람들의 통치가 기승을 부리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왕국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한국교회 문제 - 로마카톨릭교회로 돌아가려나?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오직 은혜·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많은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카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은 성례전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카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주교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고도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와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특히 예정론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한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로마교회의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시켰다. 성직자들은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하였다.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하였다.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강조하였다. 결국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구원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보다는 전통과 기구적인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독재적이며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그런 지도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멸할 것이다.

한스 큉은 성령은 로마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기보다는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카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는 말은 로마카톨릭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에 공로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중세의 로마카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하여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으로 비판하였던 개혁자들의 소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지 않고 있다.

안명준 교수 /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한국교회 문제 - 평신도들의 항의 물결에서 솟구치는 교회개혁의 희망

 올해 예장통합 총회 첫날(9월 22일) 소망교회 문제와 관련해 교회개혁실천연대의 침묵시위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도가 저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평신도가 일어나야 합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의에 찬 목소리였습니다. 곧 이어지는 말에는 힘이 더 들어가 있었습니다. "목사의 비리를 비판하는 사람이 벌받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 분도 자신의 교회 문제로 총회 장소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짧은 두 마디였지만 요즘 평신도들의 생각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그 분이 현재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가 속해 있는 교단의 대표급 인사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항의시위를 하며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평신도들 사이에 어떤 꿈틀거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임에는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평신도'라는 단어 자체도 '특별한 목사'와는 달리 '평범한 성도'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종교개혁 정신에 전혀 걸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루터가 잘 밝혀준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받음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동등한 위치를 갖게 됩니다. 다만 기능에 있어서 은사에 따라 차이가 날 뿐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비목사 성도보다 특별하거나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평신도라는 단어는 더 좋은 표현이 만들어지는 대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서 사라져야 할 단어입니다. 그 때까지는 목사 성도와 비목사 성도 사이에 권위주의적으로 왜곡 형성된 위계질서를 제거하는 운동을 펼쳐 가는 과정에서 결의를 다진다는 뜻에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평신도들이 억압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물론 목사가 착하고 충성되게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길 때 성도들은 그를 귀히 여기고 잘 순종해야 합니다. 그의 연약함과 실수를 감싸주어야 합니다. 또한 평신도이기 때문에 판단력에나 도덕성에 있어서 언제나 목사보다 더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목사가 불의와 비리를 저질러 놓고는 회개는커녕 오히려 목사의 거짓된 권위로 평신도들을 윽박질러 굴종시키거나 길들여온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다시 생각납니다. 소망교회 앞에서 시위할 때 소망교회의 한 점잖은 성도가 "우리 목사가 살인을 했다고 해도 우리는 따라 갈 거야"라고 목청을 높였던 장면입니다. 단지 흥분해서 나온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놀랍게 길들여진 신앙적 확신입니다. 히틀러에게 매료되어 독일 국민들이 유대인 학살에 열광했던 것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성도들은 침묵하거나 굴종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보다 더 높이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거나 인격적인 모독을 자행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충언하고 두 세 사람이 함께 권면해도 돌이키지 않으면 공적으로 치리해야 하고, 그 길마저 막히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공적인 항의를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과감히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4:19; 5:29).

허나 대형교회일수록 감히 성도들이 올곧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목회자의 막강한 권위에 잘 길들여져 있는가 하면, 자신과 교회의 명예가 서로 얽혀있는 이해관계의 현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형교회 성도들이여! 눈을 들어 여기저기서 깨어 일어나고 있는 평신도들의 물결을 바라봅시다.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함께 침묵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시다. 하여 교회개혁 역사의 대열에 함께 하기를 진정 바랍니다.

박득훈 목사

뉴스앤조이


 
한국교회 문제 - 목회자의 윤리 실종

성, 물질, 명예, 권위의 덫에 걸린 목회자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많이 받아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로 목회자의 윤리적 붕괴를 맞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의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극심해지고 있는 성적 타락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지른 목회자가 있었으며,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다.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몇몇 목회자들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의 사용에 문제를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빚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 타락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먼저 목회자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 타락에서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의 시대라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 전 성 경험은 해마다 그 숫자가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성 윤리는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으로 즐기고 보자는 사고로 전환되고 있다.

많은 인터넷 음란사이트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메일을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에게도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따르면 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은 46건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성 문제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성 문제로 교회에서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 타락은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돈·명예·권위에 대한 집착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복음주의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최근의 한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느 초대형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

요즘 한국의 어떤 목회자들은 교회를 조용히 사임하거나 퇴임하는 조건으로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하여 어떤 목회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교회의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자기가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에 대한 시험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직함보다는 섬기는 리더와 봉사하는 종으로, 모든 사람들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을 서로 하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쓰고,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하여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가 있는 것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 전에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최근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자들 역시 개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왕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기관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하여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의하여 공식으로 결정된 목회자 윤리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안명준 /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뉴스 앤 조이



 한국교회 문제 -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소형교회 심각한 타격...기독교 공동체 일치성 훼손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관심이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국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대형교회는 많은 목회자들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성장이론의 대가인 맥가브랜의 교회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한국 초대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하여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교회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 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게 하였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교회의 생태계에 지각변동이 왔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들과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생기는 문제점은 바로 담임목회자의 힘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를 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있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한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안명준 교수 /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뉴스 엔 조이



한국교회 문제 -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예수 믿는 것과 물질 축복을 정비례한다는 기복신앙

현재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무속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머니즘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머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먼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이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머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 단체들의 행사에서 진혼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을 조장하는 무속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보다도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왕국으로서 심지어 신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으로 통하여 방송되었다. 무속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미신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머니즘(Shamanism)에서 샤먼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그스족의 언어인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 예언자 및 의사를 뜻한다. 만주족의 살만과 인도의 sramana(산스크리트어로 승려)은 동일 계열의 어원으로 알려졌다. 샤먼의 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백재,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때 멸종한 듯 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에서 나타난다.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머니즘적 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는 믿음이다.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앙은 현세 중심적 기복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 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와 샤머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 고치는 일에만 제한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이 자신을 위하여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가깝다. 아무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안명준 교수 /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뉴스 앤 조이


 
가짜 박사 중 목회자 상당수 "낯뜨겁다"

논문 한글로 작성해도 외국서 통과…논문 대신 써주기도

▲ 한기총 소속 교단인 합동중앙은 140여 명의 목사들이 가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사진은 이들이 박사학위를 받은 풀 가스펠 국제총회 성서신학대학교는 설립된 적이 없다는 내용의 공문.

최근 부패방지위원회(위원장 이남주)는 "외국에서 직접 공부를 하지 않았거나 한글로 논문을 쓴 박사학위는 모두 가짜"라고 발표했다. 부방위는 이와 함께 한국학술진흥재단에 신고된 복수학위수여자(박사학위 2개 이상) 58명에 대한 표본조사에서 실제로 정상적인 유학방법을 거치지 않고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르며, 이들 중 대다수가 목사, 현직교수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부방위가 밝힌 가짜 박사 명단에 목사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 내에 이런 풍토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대표회장 길자연 목사) 가맹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중앙·총회장 조옥련 목사)는 전직 총회장을 포함 교단 내 인사 140여 명이 신학박사 행세를 해왔지만 가짜 박사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 주었다.
또 한글로 학위 논문을 작성해도 친절히 영어로 번역해주는 학교도 있다. 1년에 1개월 정도 미국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한국인만을 위한 반이 따로 있고 한국인 통역사도 있기 때문이다. 학위 취득 국가를 15일에서 한 달 정도만 방문해도 목회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곳도 있다.
 
한글 논문 영어로 번역해드립니다
오랄로버츠대학교(7777 South Lewis Avenue Tulsa)의 경우 목회학박사(D.Min) 과정 3년 동안 정작 미국에서 공부하는 기간은 3개월에 불과하다. 1년에 1개월 정도만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미국에 가서도 한국인을 위한 반이 따로 있고 한국인 통역사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학은 나머지 기간에 대해서는 한국에 있는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임열수·대전광역시 중구 용두동)에서 강의를 듣고 있다.
지난 2002년 이 대학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성실환 목사(대전목양교회)는 "6월 경 미국으로 출국해 한 달 정도 공부한다"며 "그러나 한국인반이 따로 있고 한국인 통역사도 있다"고 말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대학은 박사학위 논문을 한글로 작성하면 영어로 직접 번역도 해준다. 이 대학 국내사무소 한 관계자는 "한글로 논문을 쓸 경우 우리가 직접 미국에 번역을 의뢰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영어 한 마디 쓰지 않아도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경기도에 위치한 C대학 K 교수 역시 1998년 미국 U대학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한 후, 한 달  만에 F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이 교수가 학위 취득 국가인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96년 15일이 전부다.
 
한기총 소속 합동중앙 140명 가짜박사
박사학위로 인해 일부 목회자들은 법의 심판까지 받아야 했다. 서울지방법원은 지난 2003년 9월 미국에서도 공인받지 않은 풀 가스펠 국제성서총회 신학대학교를 한국에 있는 것처럼 교단의 이름으로 신학대학원을 만들고 가짜 박사학위를 수여한 강용식 목사(중앙총신교회)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서울지방법원은 판결문에서 합동총회신학연구원이 △강의실과 강의시간표, 학사일정표를 갖추고 교수라는 표현을 썼으며 △교무처장·학생처장·사무처장 등 학교 형태의 교직원을 둔 사실 △학생들을 모집해 학사·석사·박사학위를 수여한 사실 △매 학기 등록금을 받아 온 사실 등을 들어 피고인이 학교설립 인가를 받지 않고 위 신학연구원에 대해 학교의 명칭을 사용하거나 학생을 모집해 시설을 사실상 학교의 형태로 운영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기총 가맹교단인 합동중앙 교단은 강용식 목사뿐 아니라 전직 총회장 등 무려 140여 명에 이르는 교단 내 인사들이 그 동안 가짜 신학박사 행세를 해 온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이 문제는 교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합동중앙 측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자체조사를 벌였지만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합동중앙 총회는 이 사건과 관련, 2000년 전권위원회를 소집하고 자체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교단의 주요 인사뿐 아니라 교단 대부분의 인사들이 풀 가스펠 국제성서 총회신학교와 연계돼 사실상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동중앙총회는 현재 '온라인 신학대학교'를 구성, 계속 학생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서울 신림동에 위치한 모 교회 S목사는 1997년 9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자신의 교회에 미국 모 통신대학 한국사무소를 설치하고 종교학 등 10개 학과를 편성, 대학을 운영하다 '고등교육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불구속 기소됐다.
2001년에는 부산 K대 전 학장인 P 교수가 K신학대학 건물에 미국 루이지애나 침례대학원의 분교를 설립한 뒤, 석사과정 26명, 박사과정 28명을 입학시켜 수강료 2억 4,000여 만 원을 받았으며 일부는 학위까지 수여해 역시 '고등교육법 위반'으로 구속된 바 있다.
 
교수진 대부분 목회학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총회장 조광동 목사) 인준 신학교인 대전기독신학교 교수진은 대부분 명예신학박사와 목회학박사로 구성돼 있다. 교단 인준 신학교 교수진으로 보기에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다. 이 학교 홈페이지에 나온 교수진은 모두 24명. 이 중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는 김경중·최낙중·성실환·정인석 박사 등 모두 네 명이다.
이 중 최낙중 목사(관악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오랄로버츠대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경중 목사는 오랄로버츠대에서 1996년 목회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 목사 역시 다른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박사과정을 마쳤다.
김 목사는 미국에서의 정확한 체류기간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며 "목회학박사는 목회현장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학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목회학박사학위는 이렇게 취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오랄로버츠대는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이 포함되어 있는 ATS(북미주신학협의회) 소속이기 때문에 대충대충 공부해서는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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