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6일 일요일

존 칼빈-1

존 칼빈-1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이 땅에서 목회자, 아니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면 칼빈(John Calvin, 1509.7.10-1564.5.27)이란 이름과 너무 친숙하다. 요한(존) 칼빈 또는 쟝 깔뱅, 장 칼뱅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름만큼이나 칼빈은 여러 사람에게 회자된다. 칼빈은 ‘장로교의 창시자’이다. 더욱이 올해는 칼빈 탄생 500주년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고 있다. 이를 기념해 올해 신학계 및 단체, 장로교단에서는 교회의 본질 회복, 한국신학의 세계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목사)는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하고, 개혁주의성경연구소도 ‘칼빈주의와 자본주의, 민주주의 정신’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김성영 목사)도 올해 진행되는 두 차례의 정기논문 발표회를 ‘칼빈과 교회개혁 및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신학적 과제’를 주제로 정했다.

지난해 10월 조직된 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대표: 이종윤 목사)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와 연합해 오는 6월에 ‘칼빈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서울교회에서 감사예배 및 기념음악회,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와 함께 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한 ‘장로교 지도자 간담회’도 가질 예정이다. 또한, 이 사업회는 칼빈의 흉상 제작, 우표발행, 칼빈 길 만들기 등의 기념행사도 마련했다.

국외적으로도 많은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오는 5월 29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는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장로교대회가 열리고, 5월 31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세계 장로교회가 함께하는 기념예배가 열려 칼빈의 업적을 기릴 예정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과 스위스개신교연합(FSPC)도 오는 11월 2일 제네바의 종교개혁 벽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칼빈이 끼친 신학적, 사상적 연구가 이처럼 활발한 데 비해 칼빈의 설교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 칼빈의 자료와 칼빈에 관해 연구된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기에 그 자료를 다 섭렵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둘째, 인지도가 높은 인물인 칼빈에 대하여 학문적 예봉을 세우며 참신하고 창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셋째, 칼빈에 대한 선이해가 설교자라기보다는 신학자나 주석가 또는 교의학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점이다.

넷째, 무엇보다 우리와 동시대 인물이 아니기에 지금과 같이 동영상과 음성 등을 통해서 전인격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오직 남겨진 문서로만 설교 전반에 관한 것을 이해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설교문과 주석 등이 자료로 남아 있어 ‘거룩한 상상력(?)’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활용한다면 오히려 풍부한 그의 설교 사상과 언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칼빈은 스스로를 ‘말씀의 사역자’로 불리길 원했다. 한 시대를 살면서 주를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설교자 칼빈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노용(Noyon)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게라드 칼뱅(Gerard Cauvin)은 자수성가한 사람으로서, 노용 감독의 비서 겸 법률 고문직에 올랐고 노용의 상당한 귀족 가문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개혁자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귀족들과 접촉이 많은 덕으로 말미암아 교회 계통의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14세 때 로마 가톨릭 장학금으로 파리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연구했다. 여기서 종교개혁에 호의적인 길라우메 콥(Guilaume Cop)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다. 그와 함께 공부하던 친척 올리베탄(R. Olivetan)은 뛰어난 히브리어 학자로서 칼빈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교수는 언어학자 꼬르디(Mathurin Cordier, 1479-1564)다. 그는 독특한 문체로 유명했는데 칼빈에게 효과적이면서 유용한 공부습관을 길들여 주었다. 그리고 칼빈에게 종교개혁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칼빈의 아버지는 본래 그에게 신학을 공부시키려 했으나 1527년 그가 노용의 고위 성직자들과 다툰 후에 법률학을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칼빈은 법률 공부를 위해 유명한 법률학 피에르 레스똘레(Pierre de l'Estoile) 교수가 있는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1년 동안 공부했다. 여기서 칼빈은 종교개혁에 대한 호감을 가진 헬라어 권위자 볼마르(Melchio Wolmar) 교수 아래서 배웠다. 1529년 볼마르 교수가 보르께스 대학으로 초빙되자, 칼빈도 학교를 옮겨갔다. 그는 거기서 유명한 법학교수 알시아티(A. Alciati)를 만난다. 위의 두 교수들은 장차 칼빈이 종교개혁자가 되도록 훈련시킨 중요한 인물이다.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1527-1528년경 부르주에서 칼빈의 설교 역사가 시작된다. 그의 초기 설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칼빈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베자(Beza)와 콜라돈(Colladon)이 칼빈이 두 마을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1529년이나 1530년 즈음에 설교를 시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칼빈은 1529년 6월에서 1534년 5월까지 퐁레베크에서 성직을 수행했다. 따라서 베자의 진술이 정확하다면, 그는 이곳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다(T. H .L. Parker, <하나님의 대언자: T. H. L.파커가 전하는 칼빈의 설교이론>).

1532년 5월, 칼빈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법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부루즈를 떠나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이 못 되어 그의 첫 저서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 주석>을 출판했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 황제 네로(Nero)가 무자비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것에 대하여 스토익주의자로서 동정심을 금할 수 없어 네로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칼빈 역시, 당시 프랑소와 I세가 프랑스의 개신교도에 대한 무자비하게 박해를 보고 인문주의자로서의 분개를 금할 수 없어 프랑스 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썼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 칼빈은 교회의 평화는 칼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음을 강조했다. 현재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순교 당하는 개신신교도들은 소크라테스보다도 더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며, 그들을 죽이거나 박해하지 말라는 글을 썼다.

칼빈의 회심과 <기독교 강요> 출판
칼빈이 언제 회심을 경험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자신의 회심 내용을 그 어디에도 분명히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자(Beza)는 칼빈이 1528년에 이런 경험을 했을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1533-34년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말할 때에 그날이나 상황보다 회심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가에 관점을 두고 기록했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이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보았습니다. 마치 빛이 내 위에 막 쏟아져 비취는 것 같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과오의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었는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부정하고 더러웠는가를 밝히 보았습니다. 내가 빠져 떨어진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한 나의 두렵고 떨리는 심정, 영원한 죽음의 절망에 대한 무서운 위협, 이런 것 때문에 나는 한 시간도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로 나는 당신의 지시하시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많은 통곡과 눈물로 나의 과거를 저주하면서 나는 떠났습니다.”

칼빈은 <시편주석 서설>(1557)에서도 ‘갑작스런 회심’(subito conversio)에 대하여 언급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에 의해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이렇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칼빈은 회심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간단하게 말하고 있지만, 소명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이 1533년 파리대학 학장인 니콜라스 코프(N. Cop)의 취임연설문 초안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주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 코프의 연설이 파문을 일으켰다. 로마교회 지도자들과 법률가들은 이 연설문에서 파리 성직자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코프를 이단자로 선포하고 체포하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 코프는 청년들과 학생들이 도와 체포될 무렵, 1시간 후에 바젤을 향하는 도상에 있게 되었다.

그러자 칼빈도 파리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어 고향 노용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안굴렘성당 수석신부인 친구 틸레 (Lonis de Tillet)의 집에서 1534년 4월까지 머물면서 <기독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저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도 불안하여 1534년 10월 스위스로 향했다. 프랑스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스트라스부르그를 방문한 후 바젤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조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1535년 8월까지 탈고하고 같은 달 23일 이 책의 서문으로 프랑스 개신교에 대하여 관용과 이해를 청원하는 국왕 프랑소아 1세에게 드리는 편지를 씀으로써 저술을 끝마쳤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었다. 이 책은 다음해인 1536년 3월 바젤에 있는 토마스 플라터(Thomas Platter)출판사에서 출판했다. 520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책이었다.

신앙의 명백성을 드러낸 <기독교 강요>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교회의 네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진리 전체를 계통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시민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일종의 기독교 교육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강요>가 기독교 역사에 이룬 업적은 엄청나다. 모든 인간이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를 중세교회는 기계주의의 육안으로 보게 하려했지만 그것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칼빈은 이 책을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해 나가며 저술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목적은 개신교도들이 믿는 신앙을 명백하게 설명함으로써 동료들의 오명을 벗기고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개혁주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 강요>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온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리의 해석서로 평가받고 있다(Williston Walker,<기독교회사>, p.128).

<기독교 강요>를 발행한 칼빈은 휴양차 틸레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Ferrara)에 있는 에콜 공비, 르네(Renee) 왕녀를 방문했다. 왕녀 르네는 루이 11세의 딸로서 본래 개혁 정신에 찬동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불행한 운명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피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칼빈은 여기서 개혁운동을 계속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법황의 압력으로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 잠깐 바젤로 갔다가 파리로 돌아갔다. 거기서 가사를 정리한 후 동생들을 데리고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평온한 가운데 연구생활에 전념할 생각으로 1536년 6월 파리를 떠났다. 이 일은 칼빈이 파리와 영영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우연하게도 프랑스 왕 프랑소와 1세와 독일 왕 찰스 5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그에 이르는 도로가 막혀버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남쪽으로 우회하여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들렀다.

칼빈은 1536년 7월에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파렐(Farel)을 통해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 헌법이 된다. 같은 해에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538년 2월, 반대파 지도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칼빈의 강력한 지도력은 제네바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칼빈은 고의적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갈로 인해 생활은 점점 힘에 겨웠다. 개혁 반대자들은 칼빈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두 번째 후예’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결국, 의회는 파렐과 칼빈에게 제네바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그는 소란스런 제네바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칼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해 칼빈은 3년 정도 머물며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도 썼다.

더불어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발간했다. 또한, 목사로서 피난민 교회에서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했다. 여기서의 경험이 후일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교인 훈련, 성만찬, 회중 찬송, 심방, 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뒤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재입성과 연속되는 고난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을 갖고 일을 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그는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에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작성하여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조직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누구나 쉽게 성직자가 되었다. 칼빈은 성직자의 규범과 표준을 세우고 모든 분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형성했다. 제네바는 성베드로, 성제르베, 라 마들렌 등 세 교구로 나누고 이를 다섯 명의 목사가 섬겼다. 1542년에 전염병, 부인의 사산아 출산, 외국인인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칼빈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47년 2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했고, 7월에는 그들을 거스르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칼빈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549년 3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잠시 낙담했다. 칼빈은 이 밖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편두통과 통풍, 발열, 이질, 폐결핵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설교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중단될 수 없는 개혁운동
1549년 10월, 의회의 지시에 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틀에 한 번씩 하던 설교를 매일 한 번씩 하게 된다. 자주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칼빈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난민 협회’로 알려진 한 단체가 칼빈의 설교 가치를 파악하고 돈을 내어 설교를 받아 쓸 수 있는 비서를 구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늘 고국인 프랑스 교회의 안녕을 걱정했다. 프랑스 교회 역시, 칼빈을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1546년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553년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빈은 종교회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사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일어난 괴로운 싸움의 절정이었다.

일부는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한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 폐기론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될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통해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학자이며 그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교수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불과 162명의 학생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 칼빈
칼빈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열정적인 학자였다.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법학, 언어, 신학, 철학, 역사 등에 능통하였다. 그의 생애 중 27년간 성피어레(St. Pierre) 교회에서 일주일에 5-6회 설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로 기록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설교집과 주석, <기독교강요>는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 칼빈의 사상이 전달되었다. 1564년 2월, ‘천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5월27일 저녁에 임종했다.

그의 유언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 존 칼빈, 하나님의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칼빈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설교 사역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근거였다.

설교자 칼빈의 과도한 고난
칼빈의 설교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가톨릭 성직자들의 비행을 더욱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개혁되고 갱신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또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칼빈의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칼빈의 민주주의적 설교를 감사하게 회상하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이 칼빈의 설교에 감동받기 어려운 요소는 그의 삶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비해 지나치게 연속된 시련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개혁신앙 때문에 제네바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고통은 대단했다. 온갖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지킨 칼빈을 존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 오지 않을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삶을 표본으로 삼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종교개혁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엄청난 저항과 맞바람을 맞은 결과물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그가 관계를 단절한 로마, 즉 과거의 로마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진용을 정비한 로마가 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당시 로마의 신학자)들과 스콜라주의자, 궤변론자인 소피스트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칼빈이 이러한 로마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둘째, 재세례파(the Anabaptists)다. 이들을 광신도, 열광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셋째, 극단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이다. 라블레(Rabelais), 돌레(Dolet), 페리에(Périers) 같은 파리의 자유사상가들과 신이교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르소 학파 추종자들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대파들이다. 이처럼 칼빈은 수 없이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과 비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더욱더 말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나갔다.

이처럼 삶의 정황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점점 더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적실한 적용의 눈을 갖게 한다. 또한 극도의 아픔과 시련은 칼빈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는 날카로운 적용이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칼빈의 삶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인류 역사의 새로운 생각을 정립시키다
쟝 칼뱅(Jean Calvin, 1509-1564) 탄생 500주년을 맞아
노영상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2009년은 칼뱅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와 프랑스에서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다. 장신대에도 500주년을 기념하며 프랑스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동상을 교정에 설치할 계획 중이다.

칼뱅은 처음에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20대 초반에 개신교로 회심하였다고 추정된다. 그의 최종 학위는 1531년 오를레앙 대학에서 받은 법학박사이다. 학위를 마친 후의 그의 생애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533년에서 1536년까지, 그는 프랑스의 앙굴렘과 스위스의 바젤에 전전하며 신학을 연구하는 기간을 갖게 된다. 이후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칼뱅은 당시 1만 여명의 인구를 가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제1차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즈음에 그는 제네바 시의회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제출하여 통과 받음으로, 제네바 시민의 종교교육과 교회조직을 관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과감한 시도는 반대자들의 벽에 부딪혀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바, 기욤 파렐(Guillaume Farel)과 함께 성찬방식에 대한 논쟁에 연루되어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그는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1538년에서 1541년까지, 지금은 프랑스 영내에 있으나 당시는 독일 땅이었던 스트라쓰부르크에서 프랑스 피난민을 위한 목회생활을 하였다.

마지막 기간으로 1541년부터 1564년 5월 27일 그가 서거하기까지, 그는 제네바에서 두 번째 생활을 하게 된다. 제네바 시민들이 칼뱅을 다시 불렀기 때문이다. 제2차 제네바 생활 중, 1541년에 “제네바 교회의 법령”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1542년 방대한 양의 “제네바 요리문답”을 완성하였는바, 그것은 1552년의 “제네바 신조”의 기초가 되었다. 1559년 그에 의해 세워진 제네바 아카데미는 지금의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다.

그는 이 기관을 세움으로써, 제네바를 개혁운동의 거점도시가 되게 하였다. 또한 그는 각 국의 종교개혁자 및 집권자들과 서신들을 교환하였으며, 프랑스 신앙고백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등, 당시 유럽에서 일고 있는 개신교운동을 하나로 묶는 일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칼뱅을 포함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불링거(Heinrich Bullinger) 등의 신학적 영향 하에서,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가 유럽에서 형성되게 된다. 이 개혁교회는 우리나라에선 일상적으로 장로교회라고도 불린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중심이 된 독일의 루터교회, 헨리 8세의 수장령에 의해 설립된 영국의 성공회 등과 함께, 개혁교회는 개신교회(the protestant church)의 주요 교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발전한 개혁교회의 형성에 일조하였던, 칼뱅의 사상은 그간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두 이념이 모두 칼뱅의 사상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칼뱅주의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또한 서구 시민민주주의 정치체제, 그것의 사상적 기반인 로크와 루소 등의 자연권사상 및 근대의 시민혁명이 칼뱅의 신학과 연관된다는 견해들도 있다. 하지만 칼뱅의 사상을 이러한 이념들과 직접 연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그들 사이에 내용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정도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칼뱅은 그의 새로운 사상 때문에 많은 역경을 치러야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개혁적인 사상이 사회에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칼뱅은 이 같은 개신교의 사상이 위험한 사상이 아니며, 인류의 복리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변호하였다. 1559년 7판으로 마무리 된 그의 필생의 역작『기독교강요』는 신론, 기독교, 성령론, 교회론의 4권으로 되어 있다. 깔뱅은 개신교 신도들이 그의 모국인 프랑스에서 박해를 받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기독교강요』를 집필하였음을 초판의 서문은 보여준다.

새로운 사상이 사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사상을 개진하였으며 인류 역사에 남는 새로운 생각으로 정립시켰다. 오늘의 시대에도 난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 있는 생각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신학계와 사상계의 첨병들을 발견할 수 있는바, 우리는 그들의 새로운 노력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름의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전의 생각을 반복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새로운 생각을 창출하는 것엔 많은 노력이 든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타임지가 10대 사상으로 선정한 ‘칼비니즘’

바이블파워     

    금융위기 속에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상으로 칼비니즘(Calvinism)이 새로이 부각되고 있다고 <크리스천투데이>가 보도했다. 신문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 최신호(3월 24일자)가 ‘지금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10가지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와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사상의 흐름을 진단하고, 칼비니즘을 그 하나로 꼽았다고 보도했다. 금융위기로 힘든 시기를 맞아 ‘안전함’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건국 초기와 같은 엄격한 절제와 금욕으로의 회귀를 보이고 있으며, 타임지는 이러한 현상을 ‘뉴 칼비니즘(New Calvinism)’으로 명명하며 칼비니즘에 대한 끊이지 않는 교계와 신학계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이 같은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신문이 인용한 타임지에 따르면, 출판계에서도 칼비니즘의 관점으로 쓰여진 ‘ESV 스터디 바이블’ 등이 매진될 정도로 칼비니즘이 미국 내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으며, 사이버 세계에서도 칼비니즘과 관련한 사이트들이 기독교인들에게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칼비니즘, 즉 칼빈주의가 금융위기 속의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오는 7월로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는 장로교회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맞물려 그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 칼빈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할 현 경제위기 속에서 존 칼빈의 엄격한 금욕주의가 매력 포인트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원래 ‘금욕주의’란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행위로서의 중세 수도승들의 교리였지만, 종교개혁가로 칭해지는 존 칼빈의 금욕주의는 그와 달리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구원받은 자(예정·선택과 관련)가 세상 속에서 삶의 성화를 이루기 위한 절제와 금욕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하는 구원은 과연 성경적인 교리인 것인가? 인간이 의지까지 타락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게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강제로 택하여 구원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칼빈의 구원관이다. 칼빈은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이 창세 전부터 선택되었기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된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구원이 예정되어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이단 교리를 주장한다. 칼빈의 금욕주의는 믿음 생활 잘하고, 항상 잘 믿고, 타락하지 않아야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성도의 견인’에서 드러나는데, 오늘의 이슈와 관련해서는 절제와 금욕을 통해 탐욕을 멀리하고 끝까지 견뎌야만 비로소 자신이 택함받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영적으로 깨닫고 분별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들이 칼빈의 금욕주의를 반기는 것은 단지 그들의 돈지갑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귀가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칼빈주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상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은 칼빈주의가 성경의 진리와 무관한 사상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적인 증거이다. 성경의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거부되어 왔으며,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전파했던 성도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았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세상으로부터 선택하였느니라. 이로 인하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칼빈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을 미워하는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다면, 그것이 과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교리이겠는가? 『그분[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칼빈주의가 해놓은 일은 예정되고 선택받은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비성경적인 교리에 불만을 품은 수많은 혼들을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여 자포자기적인 방탕의 수렁에 빠뜨리고, 또 그것을 추종하는 세속적인 교회들을 무력하게 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회봉사에 매진하게 한 것뿐이다.
    칼빈주의는 금융위기 속의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절제와 금욕으로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매우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부도난 회사와 같으며 지금 멸망해 가는 중이다. 멸망할 세상의 희망은 존 칼빈의 금욕주의를 따라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아니다. 세상의 희망은 그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실 수 있고, 이 땅에 만물을 회복시키고 천년왕국을 가져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칼빈’을 크게 높이지 말라

바이블파워     

    한국교회갱신연구원(원장 이종윤 목사)이 지난 3월 30일부터 시작한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장을 위한 제35학기 목회자 신학세미나’의 두 번째 시간에 초청된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가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나타난 신학적 특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고 <아폴로기아>가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수영 목사는 "칼빈의 5대 강령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는 세력의 주장을 정죄한 화란개혁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압축 요약한 것”이라며, 소위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 일컬어지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이 다섯 가지 명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세 가지 사고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전적 무능력’,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 세 가지”라고 설명하고, “이 다섯 가지 명제나 세 가지 근본적 사고는 모두 예정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들이다”고 전했다.
    이수영 목사가 칼빈의 예정론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제시한 위의 세 가지 사고는 겉만 보고는 그 옳고 그름을 쉽게 판별할 수 없다.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내면적 본질을 가린 표면적 구호만으로 대중을 그릇 인도하는 것을 볼 때, 영적인 일에 있어서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만물에 대해 가지시는 주인된 전적인 권한과는 다른 개념이다.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한 인간의 혼을 복음에 대한 그의 의지적 믿음과는 관계없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옥에 보낼 수도, 하늘 나라에 보낼 수도 있는 전제 군주적 주권 개념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그분의 주권에 따라 지옥에 보내려고 정해 놓으실 만큼 악한 분이 아니시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니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너희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겔 33:11).
    또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란 단순히 인간이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까지 타락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를 써서 스스로 영접할 수 없을 정도로 의지가 무능력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선택하여 부르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회개할 수가 없어 지옥으로 예정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부르심의 권한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칼빈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전적 무능력은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전적 타락’을 말하는 것인데, 이 ‘전적 타락’은 나머지 네 강령들의 기초를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강령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타락이 그의 자유의지까지 미쳐 그가 의지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주님은 『이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고 말씀하며 모든 이들에게 의지를 써서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촉구하신다. 또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며(요 1:12), 무력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신 4:29, 렘 29:13, 행 17:26,27, 히 11:6).
    마지막으로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은 성경적인 은혜로 인한 구원(엡 2:8)과 다르다. 칼빈이 말하는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선택하신 죄인의 의지를 강제로 이끄셔서 그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인간은 마치 꼭두각시와 같아서 끈을 원하는 방향으로 당겼다 놓았다 하시는 하나님께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오직 악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짓지 아니하셨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택할 수도 있고, 의를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너희가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너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든지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 6:16).
    존 칼빈이 로마카톨릭으로부터의 종교개혁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5대 강령이 성경적인 교리인 것은 아니다. 이수영 목사가 칼빈의 예정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시한 세 가지 사고는 진리를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끌려는 캐치프레이즈일 뿐, 그 내면에 감춰진 이단 교리는 많은 사람을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왔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여 칼빈의 신학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려는 노력들이 일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기념하고 세상이 주목한다 해서 칼빈의 교리가 성경적인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늘 소수에 의해서 믿고 실행되어 왔다. 진리는 곧 좁은 문인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진리의 지식이 없는 그가 자신이 해석할 수 없는 성경의 특정구절에 치중하여 그것을 왜곡한 것일 뿐, 성경은 예정론을 금하는 말씀들로 일관되어 있다.
    칼빈주의자들이 주의하고 각성해야 할 것은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은 하나님과 무관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어디에서 인간을 기념하라 하셨는가?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시느니라.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눅 16:15). 칼빈을 추종하는 이들은 칼빈의 5대 강령을 억지로 끼워 맞추듯 변증적으로 홍보하기보다는,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전체 진리와 일치하는지, 또 상식적인 판단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는지를 먼저 검토하는 것이 옳은 일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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