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4일 금요일

탁월한 옥외 설교가 조지 휫필드

탁월한 옥외 설교가 조지 휫필드
 


1
. 생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거의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였고 예민한 양심은 죄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결국 그가 일하던 술집을 나와 옥스퍼드로 향하였다.
그는 18세에 옥스퍼드의 팸브록 칼리지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함으로서 그의 일생이 변화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명의 웨슬리, 요한과 그의 동생 찰스를 알게 되었고 엄격한 생활 방식(method) 때문에 처음으로
Methodists로 불렸던 경건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 벌레들', '성경꾼들',
'성찬 증시자들', '형식주의자들', '홀리 클럽' 등으로 불렸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긴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을 실천했다.
그 모임 회원의 한 사람인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홀리 클럽의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그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 한 권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때까지 휫필드는 '중생'의 기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선행으로서 천국의 도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35년에 회심하여 1736년부터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1736년은 그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해로서 6월 20일 그의 나이 21세에 글로스터의 감독 벤슨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일주일 후 6월 27일에 성마리아 크립트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였다.
8월에는 런던의 비셥스게이트에서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집회를 열었고 런던타워 예배당의 대리목사로 봉직하였다.
두 달 후 햄프셔에서 교구목사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죤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 죠지아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1731년 1월 브리스톨에서 첫설교를 하고 1737년 5월까지 이곳에서의 설교활동은 계속되었다.
휫필드는 광부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킹스우드 스쿨을 설립했으며, 웨일즈 장로교회로 불리는 웰쉬 칼빈적
메도디스트 교회의 지도자가되었다.
그는 1743년에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의 영향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확대되었다.
1740년 이후 휫필드가 미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1735년 제1차 대각성운동을 능가하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었다.
그는 미국을 일곱차례 방문하였으며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건너는 선교의 열정은 그가 34년간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2. 휫필드 부흥운동의 특징 -위대한 설교가
휫필드의 설교의 주된 내용은 원죄와 중생이었으며,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향을 믿었다.
그의 설교의 또다른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설교는 중생치 못한 자연인의 마음의 부패성과 신생의 필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차이를 느끼고 결별하였는데, 웨슬리는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하여 휫필드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다같이 평생 영국성공회 성직자로 남아 있었다.
영국성공회는 오랫동안 청교도와 투쟁하는 동안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배격하게 되었고,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브리스톨을 떠나면서 휫필드는 웨슬리가 "예정(predestination)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쟁을 하지말기를" 기원했다.
웨슬리는 휫필드가 바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예정론에 관해 "논쟁하지 말라"는 휫필드의 권고는 웨슬리로서는 따르기 힘든 권고였다.
결별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복음적 알미니우스주의와 예정론의 결별이 이뤄진 것이다.
휫필드는 1737년 런던에서 중생에 관한 일곱편으로 이뤄진 설교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중생은 외적인 고백뿐 아니라
내적인 변화요, 마음의 정결이요, 성령의 내주이고, 그러므로 신비적으로 참되고 생동감 있는 신앙에 의하여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덕목을 받는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는데, 그러나 이것을 구별하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못 박는다.
휫필드에 의하면 물세례는 결코 참된 신자의 표징이 될 수 없다.
참된 신자의 표시는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데에 있다.
그 내면적인 것이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
휫필드는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가 참된 신자의 표징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란 곧 중생을 말한다.
 
3. 공헌
죠지 휫필드는 옥스퍼드의 "거룩한 모임"의 회원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약간 상이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나 웨슬리와 병행했다.
휫필드가 기독교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모든 면에서 감리교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 그의 신학은
-자신은 칼빈을 읽은 일이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지만-알미니우스주의자라기보다는 견실한 칼빈주의였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웨슬리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설교가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활동은 급기야 웰쉬-칼빈주의
-감리교-교회(Welsh Calvinistic Methodist Church)를 탄생시켰다.
휫필드의 18세기의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당시의 잡지였던 "신사의 잡지(The Gentleman's Magazine)" 기사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엿볼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한 사회 내에서 열등한 사람의 근면은 그 부요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휫필드 목사와 같은 사람이 5,6천 명의 대중으로부터 매일의 노동을 그의 설교로 앗아간다면 적은 시간이지만
그 사회에 가져오는 손해는 얼마나 큰 것인가!
내 견해로는 만일 이 신사가 킹스우드의 광부들에게 자진해서 설교를 시작한 것처럼 여기서도 계속 설교를 해 나간다면
브리스톨 시 근방에서 얼마만큼의 석탄 가 폭등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은 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평일이나 주일이나 그가 전도하는 곳의 교회는 청중이 빽빽이 들어 찼고 굉장한 평판을 낳곤 하였다.
명백한 사실은 참으로 웅변을 잘하고 즉석에서 아무 준비 없이 설교를 하는 전도자가 순수한 복음을 보기 드문 목소리와
훌륭한 몸짓으로 전하는 것인데, 그 때 런던에서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의 청중들은 놀라고 황홀해진 나머지 넋을 잃었다.
1739년부터 177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31년 동안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었으며, 항상 주 예수의
일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휘필드는 웨슬리의 정확한 논리성과 비상한 행정력, 그리고 깊고도 강인한 성품이 결여되었으며, 웨슬리는 그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더욱 확고한 편이었다.
휫필드는 보다 신속하고 열렬하였으며 충동적이지만 그러나 웨슬리와 같은 종교적인 심원함을 소유하였으며, 더욱이
그는 웨슬리가 알지 못할 정력적인 영역에서 살았다.
거기에 첨가하여 그는 웨슬리로서는 당할 수 없는 웅변가였다.
그는 그의 일생에 걸친 설교사역에서 엡 2장 8절의 말씀을 주제로 삼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개혁자의 신앙을 이어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력한 휫필드의 삶은 굳어진 18세기
교회의 문을 부수고 무뎌진 명목상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격하였고, 내면적 부흥운동의 큰 줄기로서 그들을 중생의 길로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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