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8일 일요일

제2차 세계대전 비사(秘史)

제2차 세계대전 비사(秘史)

나치의 핵심인물들은 대개 톨레회(Thule society) 단원이었다. 사진 좌측으로부터 세보텐도르프 남작,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아돌프 히틀러,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히믈러
 
지상에서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 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포함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후 조종한 사탄숭배 비밀조직의 실체를 밝힌다.<편집자주>

툴레회, 독일 신비주의와 사탄숭배 사상 계승
반기독교적인 히틀러에게 대중선동술 가르쳐

“1919년 말 히틀러는 디트리히 에크하르트(Dietrich Eckart·1868~1923)를 만났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에크하르트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다. 당시 재력가였던 에크하르트는 반유태주의를 표방한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자이자 마법에 정통했던 인물로 당시 여러 비밀 단체를 포함해 툴레회(Thule society·프리메이슨)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Wulf Schwartzwaller 著, ‘The Unknown Hitler’, Berlkley Books, 1990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의 10년 동안 전세계에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 만큼 혼란과 격변이 계속된 곳도 드물다. 큰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꼭 전염병이 돈다. 실제로 종전되던 해 겨울에는 심한 독감이 독일 땅을 휩쓸어 10만 명이 넘는 독일인들이 사망했다. 한편 전쟁배상금을 갚기 위해 마구 찍어댄 마르크화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파탄에 이른 경제와 대량 실업사태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툴레회’ 프리메이슨 기반으로 조직

이처럼 대부분의 시민들이 식량부족과 정치적 혼란에 고통을 당하는 사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프리메이슨 조직을 기반으로 게르만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Volkisch movements)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는 수많은 프리메이슨 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이 가운데 나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프리메이슨 단체가 바로 ‘루돌프 폰 세보텐도르프’(Rudolf Glendeck von Sebottendorf·1875~1945) 남작이 1918년 8월 17일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에서 조직한 툴레회(Thule society)이다.

세보텐도르프 남작의 본명은 루돌프 글라우어(Adam Alfred Rudolf Glauer)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그는 터키여행 중 오스트리아 출신 귀족의 양자가 되어 세보텐도르프라는 성을 갖게 됐으며 터키 시민권을 얻은 후 동서양의 신비주의를 탐닉했다. 실제로 세보텐도르프는 1910년 이스탄불에서 수피즘(Sufism·이슬람신비주의)과 프리메이슨, 연금술에 입각한 프리메이슨 종단을 세우기도 했다.

1913년 세보텐도르프는 독일로 돌아와 자신의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에 산재해 있던 여러 프리메이슨 단체 회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말경 세보텐도르프는 당시 사세가 기울어가던 뮌헨의 한 영세 신문사를 사들여  ‘민족의 파수꾼’(Volkische Beobachter)이라는 이름의 주간 잡지를 발행해 반유대주의와 신비주의에 입각한 국가주의 사상(occult-nationalist doctrines)을 전파했다. 그리고 이 잡지는 훗날 나치당의 공식 기관지가 됐다. (출처: Ellic Howe 著, ‘Urania’s Children: The Strange World of the Astrologers’, London, 1967년, pp. 86~87.)

나치, 신비주의와 사탄숭배 영향 받아

세보텐도르프가 세운 툴레회는 전통적인 독일 신비주의와 루시퍼(사탄)를 숭배하는 종교의 창시자인 마담 블라바츠키(본명: Helena P. Blavatsky)의 신지학(神知學)을 접목시킨 프리메이슨 단체로 단검(dagger)과 하켄크로이츠(나치 상징)를 종단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특히 블라바츠키의 경우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반셈족주의자로 그녀가 주장했던 ‘뿌리 종족’과 ‘레무리아(Lemuria)종족’에 관한 이론은 훗날 나치가 차용해 ‘아리안족’(Aryan)의 우월성을 설파하는 근거가 됐다.
툴레회의 상징은 단검과 갈고리 십자가(하켄크로이츠)이다. 이 가운데 갈고리 십자가는 훗날 나치의 상징이 됐다.

한편 세보텐도르프는 툴레회의 비밀을 언급한 ‘Bevor Hitler kam’(Before Hitler came)을 썼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이후 그는 터키로 탈출해 1945년 5월 9일 보스포러스 앞바다에서 투신자살했다.

‘인종말살’주의자로 나치독일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나치 외교부장)를 비롯해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루돌프 헤스(부총통), 하인리히 히믈러(나치 친위대 사령관) 그리고 안톤 드렉슬러 등 나치의 핵심인물들은 대개 툴레회의 단원이었다.(1918년 말 툴레회 단원 수는 1500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루돌프 헤스의 경우 무신론자로 점성술이나 심령치료 같은 초자연적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히틀러의 동상과 사진을 제단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불을 켜고 의식을 올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툴레회의 단원 가운데 히틀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시인이며 인종주의자이자 모르핀중독자였던 디트리히 에크하르트이다. 당시 툴레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에크하르트는 1919년 8월 14일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 이후 그는 히틀러를 앞으로 툴레회가 주도하게 될 거대한 갈등과 대규모 학살을 일으킬 ‘제3제국’(The Third Reich)의 지도자로 지목했다.

당시 에크하르트는 대규모 갈등이 인간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겨 사람들을 편집증 또는 소심증 환자로 만들게 될 것이며 이렇게 소외된 사람들은 얼마든지 심리 조종이 가능해져서 결국에는 ‘죽음의 형제회’(Brotherhood of Death Society·툴레회의 원래 명칭)와 그 사악한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에크하르트는 히틀러에게 대중선동에 필요한 자신감, 웅변술, 화술 그리고 몸짓 등을 직접 가르쳤다.

1923년 12월 26일 에크하르트는 모르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임종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히틀러의 지시를 따르라. 춤(dance)은 그가 추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시킨 것은 나다. 내가 그에게 비밀교리를 따르도록 했고 그의 시야를 열어 주었으며 힘의 세력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했다”(출처: Trevor Ravenscroft 著, ‘The Spear Of Destiny’, p. 91)

독일노동당, 툴레회와 나치당 결성

툴레회는 전직 철도 수리공으로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당’(GPW·1919년 1월 결성)을 조직한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1884~1942)를 시켜 히틀러를 주축으로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NSDAP, 일명 나치당)을 결성했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이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 늘 민족문제로 고심했다. 독일인 대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가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등 지식인들의 대부분도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반기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를 유태교에서 파생되어 나온 사악한 본 뜻을 감춘 악마의 종교라고 까지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이 아니었고 유태인의 세계지배로부터 인류를 구하려다가 그만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후임으로 나타난 자신이 유태인의 세계지배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여겼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독일 군에 자원입대하여 바이에른 보병 제16예비연대에 배치되었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주로 영국군과 싸웠다. 연락병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4, 1918년에 각각 2급과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는데 히틀러는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만년까지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아이러니 하게도 히틀러에게 훈장 수여를 추천했던 사람은 유태인 장교인 후고 구트만 대위였다.)

한편 전후인 1919년 당시 하사관이었던 히틀러는 독일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던 군소 정치단체들의 동향을 체크하여 보고하는 정보관계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19년 9월 12일 히틀러는 상부로부터 ‘독일노동당’이라고 불리는 어느 작은 정치단체의 집회를 참관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물론 그는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작은 사건이 자신의 일생을 극적으로 반전시켜 놓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반유태주의에 기반 둔 독일노동당

당시 툴레회가 주축이 되어 조직된 독일노동당은 반유태주의에 기반을 둔 반혁명정당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과 애국주의를 결합시킨 중간계급 위주의 정강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 집회의 토론에 참여한 히틀러는 당 간부이자 툴레회의 단원이었던 드렉슬러의 주목을 끌었고 며칠 뒤 ‘귀하의 입당을 허가함. 9월 16일에 열리는 독일노동당 위원회에 출석하기 바람’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위원회에 출석하여 555라는 당원번호를 받았고 제7 당위원이 되었다.

당시 거의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독일노동당은 히틀러의 노력으로 공공연한 대중활동을 강화했다. 히틀러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잇달아 공개연설회를 개최하여 당세 확장에 노력했다. 그의 뛰어난 연설 솜씨도 당의 명성에 일조했다. 특히 나치의 집회는 사람들이 흥분하기 쉬운 밤 8시 이후에 주로 열렸다. 매번 집회에서 나치의 최대 무기는 정강 정책이 아니었다. 바로 에크하르트로부터 배운 히틀러의 카리스마적인 웅변술이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드렉슬러를 당의 총서기로 추대했으며 자신은 당 선전부장이 됐다. 당 조직을 개편한 독일노동당의 당세는 1920년 2월 뮌헨의 한 맥주홀에서 2,000명 이상의 청중을 모으는 대중 집회를 개최할 정도로 신장되었다. 이날 집회에서 25개조의 당강령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의 영토확장이 포함되었다. 이 강령은 툴레회의 단원이었던 에크하르트·드렉슬러·페더 등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이후 나치 ‘불변의 강령’이 됐다.

히틀러는 초기 나치 집회에서 항상 유대인 배척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패전 후 독일공화국의 나약함과 내부분열 및 부패를 공격했다. 또한 독일의 강력한 국민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불합리성과 잔혹성을 강조했다. 한편 1920년 3월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 운동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툴레회의 상징에서 차용한 갈고리십자가(하켄크로이츠) 모양의 당기를 만들었다.

툴레회 간행물, 나치당 기관지로 둔갑

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 당 대회에서였다. 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 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히틀러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그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도자’(Fuhrer : 나중의 총통)로 불리게 됐다. 또한 툴레회의 정기 간행물이었던 ‘민족의 파수꾼’(Volkischer Beobachter)을 나치당 기관지로 만들어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이후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바이에른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왕당파가 나치를 보호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나치는 바이에른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바이에른 동맹을 폭력으로 습격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나치당을 탄압했고 히틀러는 1922년 6월 24일부터 7월 27일까지 수감되었다.

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심각한 물가상승현상이 초래되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민주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민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1923년 9월 26일 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고 독일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쳤다. 바이에른에 있는 극우운동의 공동단체인 ‘독일투쟁동맹’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의한 베를린으로의 진격, 전독일 우익독재정부의 수립을 제창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의 ‘독일투쟁동맹’은 뮌헨에 있는 한 맥주 홀에서 폭동(일명 ‘맥주홀 쿠데타’)을 일으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처음에는 히틀러에게 협력을 약속했으나 군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봉기를 진압하는 쪽으로 돌아서 이 맥주 홀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히틀러는 같은 해 11월 11일 은신처에서 체포됐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9개월 동안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반(半)자서전 겸 나치사상의 해설서인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나의 투쟁’은 툴레회 단원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히틀러의 구술을 필기했고 이것을 매주 토요일 저녁 감옥 내 나치 동료들이 개최하는 공동 집회에서 발표했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치당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나치당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1923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속출했다. 독일의 경제가 통화개혁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평판도 좋아졌다. 그러나 나치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1926년 2월 당 간부회의에서 히틀러는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 이복누이의 딸과 관계 맺어

1926년 1월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나치 돌격대의 재건을 완료했다. 이 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물론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으면 민주공화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 이 시기 그는 이복누이의 딸로 자신의 조카인 겔리 라우발을 사랑하게 되었고 1931년 9월 18일 그녀가 히틀러의 치열한 지배욕과 독점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할 때까지 항상 행동을 같이했다.

한편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과 대중선동으로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면서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정권 획득 후 반대파 모두 처형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같은 해 7월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권력을 잡자 친위대를 앞세워 1934년 6월 30일 소위 ‘피의 숙청’이라 불리는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는데 이 때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처형시켜 버렸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했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됐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인물들을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9년 9월 히틀러는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해 인류역사상 가장 큰 재산·인명 피해낸 전쟁으로 기록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미래한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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